위장(衛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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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위장 |
한글표제 | 위장 |
한자표제 | 衛將 |
상위어 | 오위(五衛) |
관련어 | 조사위장(曹司衛將), 문음무관(文蔭武官)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위장(衛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3년 4월 1일 |
조선초기 군사체제인 5위(衛)에서 위를 통솔하는 종2품 관직.
내용
위장은 5사(司)가 5위로 바뀐 1457년(세조 3)에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한 위에 한 사람이 각 위를 분담·통솔하였으나, 『경국대전』에서는 12명의 문·무관이 겸직하게 되었다. 위장은 궁내에 입직하여 5위 소속의 군사를 분정받아 순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외에도 조정에 연회나 경축행사가 있을 때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에 정렬하기도 했다. 이처럼 5위장은 왕 주변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관직이므로 대군이나 임금의 신임을 받은 관료가 임명되었다. 1일 3명씩 차례를 나누어 입직하며 3일 만에 교대했다. 입직했을 때는 동·서·남 세 곳을 나누어 각각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대궐과 도성의 내외를 순행했다. 왕의 궁궐 밖 행차를 수행할 때에는 휘하 장교와 군사에 대해 태형(笞刑) 이하의 범죄를 바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그 이상의 범죄는 왕에게 보고하여 척결했다. 조선후기에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3품직으로 격하되었고, 2명은 조사위장(曹司衛將)이라고 하여 문관을 임명했다. 뒤에 1명은 반드시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또 1명은 문음무관(文蔭武官)에서 통차(通差)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3명을 증원하여 15명이 되었다.
용례
兵曹啓 一 常時出令 本曹移文鎭撫所 鎭撫所移文衛將 若啓緊急事 依舊例發牌 招鎭撫面囑 一 五衛犯令軍士 衛將直啓 本曹及鎭撫所摘奸及行巡時犯禁軍士 亦各直啓 一 內外巡綽士之數 衛將磨勘送本曹 分更分道 且錄內外諸門把直軍士姓名 一件送鎭撫所 一件送本曹 本曹更書名以啓 宮城外軍士 衛將毋得考察 一 上大護軍數少 行巡艱苦 以出番部將 和會差定 一 衛將則吏曹以堂上官十六員注擬受點 每番五人 更三日直宿 分衛用職次 扈駕時亦受點(『세조실록』 3년 4월 1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千寬宇, 「朝鮮初期 五衛의 形成」, 『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