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재소(行在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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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행재소 |
한글표제 | 행재소 |
한자표제 | 行在所 |
동의어 | 이어소(移御所) |
관련어 | 행행(幸行), 능행(陵幸), 원행(園幸), 온행(溫幸), 행궁(行宮), 행전(行殿), 상왕행재소(上王行在所), 주정소(晝停所), 주정참(晝停站), 홍문(紅門), 작문(作門), 내작문(內作門), 외작문(外作門), 참소(站所), 포영사(布營使)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왕대 | 조선~대한제국기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행재소(行在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4년 3월 19일, 『세종실록』 3년 4월 28일, 『세종실록』 2년 윤1월 17일, 『고종실록』 4년 9월 20일, 『고종실록』 33년 5월 3일, 『순종실록』 2년 1월 10일 |
왕이 궁궐을 떠나 도성 내외를 행행할 때 잠시 휴식하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임시로 머물던 곳.
개설
왕이 궁궐을 벗어나 외부 행사를 주관하거나 왕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행행(行幸)할 때 도중에 잠시 쉬어 가는 장소를 행재소(行在所)라고 하였다. 왕의 행행 일정이 당일 궁궐로 돌아오거나 혹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더라도 이동 도중에 식사나 휴식을 위해 머무는 곳을 위해 반드시 행재소를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행재소는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陵幸), 원행(園幸), 강무(講武), 온행(溫幸)을 할 때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행재소는 왕이 왕실의 의례 및 외부 행사를 거행하던 조선 건국 때부터 대한제국기 순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이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태조이성계가 건국을 하고 나서부터 행재소가 세워졌다. 행재소는 왕의 외부 행사 일정에 따라 설치되었다. 행재소는 왕의 일상적인 의례 거행을 위해 행행하는 경우, 외침이나 변란기의 이동 시, 상왕(上王)과 시왕(時王)이 동시에 이동하는 상황 등 세 경우에 따라 설치와 이용에 차이가 있었다.
원래 왕의 행행은 군사 이동과 같은 사례였으므로 1일 이동은 90리로 하고 중간에 두 곳의 행재소를 설치하였다. 다만 하루에 두 번 행재소를 설치하는 것은 지방에 온행을 가거나 피난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행재소는 기존의 관아 건물을 사용하거나 임시로 가건물이나 천막을 쳐서 이용하였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고려하여 방어하기에 유리한 험준한 지형에 행재소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원활한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행재소는 왕의 임시 휴식처였지만, 동시에 국정을 지휘하고 보고받는 곳이었으므로 의전을 갖추고 위의(威儀)를 갖출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왕이 머무는 행재소에는 해당 지역의 관찰사와 수령들이 대기하였으므로 좁고 험준한 곳은 제외하였다(『세종실록』 24년 3월 19일).
행재소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설치한 왕은 선조였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파천하면서 숙소로 삼거나 쉬었던 곳은 모두 행재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인조도 이괄(李适)의 난과 두 차례의 호란(胡亂)이 일어났을 때에 도성을 벗어나 공주와 남한산성의 행궁에 머무는 과정에서 행재소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 밖에 태상왕(太上王)과 상왕 및 시왕 등 여러 명의 왕이 동시에 행재소에 머물거나 여러 개의 행재소를 설치한 경우도 있다. 정종과 태종, 세종의 재위기에는 궁궐 외부에 수시로 행행하던 태조, 정종, 태종이 장기적으로 행재소에 머물거나 동시에 한곳의 행재소에 머물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은 세종 재위 초기에 상왕으로 행재소에 머물다가 병조에 지시를 내려서 병조의 당상관이 세종에게 보고하면 취각령(吹角令)을 내리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세종실록』 3년 4월 28일). 태종이 행재소에서 군령을 발동하는 것은 상왕으로서의 위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재소가 휴식처의 역할만이 아닌 정무를 거행하는 공식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태종의 행재소에 관료들이 매일 문안을 올리던 것에서도 확인된다(『세종실록』 2년 윤1월 17일).
변천
조선후기로 갈수록 왕의 행행이 증가하였는데, 주로 왕실의 능침과 묘소에 가는 능행 및 원행이었다. 왕실의 능침이 동구릉과 서오릉 등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영조와 정조 등이 사친(私親)의 사당과 묘소에 가는 것이 정식화되자 행차의 경로가 늘 동일한 곳을 거치게 되었다. 이에 행재소도 행궁으로 확장하거나 아니면 늘 설치하던 곳에 두었다. 또한 정조가 시흥로를 통한 화성(華城) 원행을 정례화하자 그 후대의 왕들도 그 길을 그대로 사용하여 행행하였고, 그에 따라 행재소도 일정한 지역에 고정되었다.
조선말기와 대한제국기에도 행재소의 설치는 지속되었다. 예컨대 고종은 탕춘대(蕩春臺)에서 시사(試射)를 거행하면서 삼계정(三溪亭)에 행재소를 설치하였다(『고종실록』 4년 9월 20일). 특히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갈 때는 그곳을 행재소로 인식하고 이용하였다(『고종실록』 33년 5월 3일). 순종대에는 선조 이후 처음 의주에 행재소를 두었고,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기차를 이용하여 대구와 부산·마산 등지에 순행하고, 그곳에 행재소를 설치하였다. 순종은 마산의 행재소에서 80세 이상의 노인과 부인들을 만났다(『순종실록』 2년 1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배릉등록(拜陵謄錄)』
- 『북한지(北漢誌)』
- 『산성일기(山城日記)』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훈국등록(訓局謄錄)』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南漢山城 행차」, 『조선시대사학보』60, 2012.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한국사연구』120, 2003.
-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30, 2007.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西巡幸 연구:『西巡幸日記』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1, 2011.
- 이왕무, 「영조의 私親 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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