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勤政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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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근정전 |
한글표제 | 근정전 |
한자표제 | 勤政殿 |
상위어 | 경복궁(景福宮) |
관련어 | 국가의례(國家儀禮), 궁궐(宮闕), 근정문(勤政門), 법궁(法宮), 왕실(王室), 정전(正殿), 조하(朝賀)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조, 고종 |
집필자 | 조재모 |
건립시기/일시 | 1395년(태조 4), 1867년(고종 4) |
장소 | 경복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5칸/측면 5칸 |
양식 | 다포식 |
관련 인물 | 태조, 태종, 정도전(鄭道傳),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근정전(勤政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세종실록』 14년 10월 20일, 『정조실록』1년 9월 6일 |
조선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正殿).
개설
근정전은 조선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근정전은 문무 관료와 왕세자가 국왕에게 올리는 조회가 열리는 곳이자, 왕실의 혼례식과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국가의례 거행의 장소였다. 그리고 조하(朝賀) 의식을 행하거나, 국왕의 생일 등에 큰 잔치를 벌였으며, 근정문(勤政門)에서는 조참(朝參)이라고 하는 조회를 거행하였다.
근정전은 1395년(태조 4)에 최초로 만들어졌다가(『태조실록』 4년 10월 7일)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고종대 왕실의 권위 확립을 위해 복구되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영제교(永濟橋) 북쪽, 사정전(思政殿) 남쪽에 위치하는 근정전은 정전이며 조회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을 두 겹으로 하여 외관은 2층으로 보이나 내부 공간은 하나로 된 통층이다. 주변으로 2중의 월대를 놓았고 사방을 행랑으로 둘러쌌다.
변천 및 현황
근정전은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되었으며, ‘조회를 받는 곳’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초의 정전은 5칸이었으며 동·서·북쪽의 행각이 각 29칸이어서 마당은 정방형에 가까웠다. 이 마당의 상하층 2중 월대 위에 정전이 놓여 있었다. 대체적인 모습은 지금의 근정전과 유사하지만, 근정전 뒤편에서 북행각으로 복도각을 내어 단 것과 동루, 서루의 규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정도전(鄭道傳)은 근정전과 근정문의 이름을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는 뜻인 ‘근정(勤政)’에서 인용하였다. 근정전에서 즉위한 역대 국왕으로는 정종(1398년), 세종(1418년), 세조(1455년), 중종(1506년), 선조(1567년) 등이 있다.
근정전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조회인 ‘조하(朝賀)’와 ‘망궐례(望闕禮)’ 등이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교서의 반포, 관례와 혼례, 연회, 과거시험 등 각종 부정기적 행사가 이 전각에서 열렸다. 조하는 정월 초하루와 동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등에 정기적으로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매 5일마다는 근정문에서 조참례(朝參禮)를 거행하였다.
조하의 경우 왕은 사정전에서 의관을 준비하고 있다가 근정전으로 나오고, 문무백관과 왕세자 등은 근정문 밖, 영제교 주변에서 준비를 마치고 근정전 마당으로 들어와 예를 행하였다. 이 마당에 박석(薄石)을 깔아 포장한 것은 세종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세종실록』 14년 10월 20일). 마당에 놓인 품계석은 조선전기에는 없던 것이며, 1777년(정조 1)에 최초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품계석을 놓은 것을 계기로 고종대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1년 9월 6일).
임진왜란까지 근정전에 관한 큰 정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의 형태가 대체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근정전은 1867년(고종 4) 11월에 중건한 것이며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대대적인 지붕 부분 해체 수리 공사가 있었다.
형태
현재의 근정전은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전체 규모는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이며 지붕은 중층 팔작지붕으로 하였다. 외부에서 보면 지붕이 두 겹으로 되어 있어 2층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통해 있다. 상층도 하층과 마찬가지로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지만 툇간의 크기를 줄여 전체적으로 하층보다 몸체의 크기가 작다. 이렇게 상하 칸 수를 유지하고 상층 양 끝의 칸만을 줄임으로서 건물의 외관이 보다 장중해 보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찰의 불전 등 다른 중층 전각의 사례와는 달리 상층의 귀기둥을 하층까지 내려 통주로 쓴 점이 특이한데, 이는 인정전 등 궁궐 정전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상층 가구는 고주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얹었다. 하층 처마는 하층 공포의 내목도리 상단에 서까래를 걸어 구성하였는데 내목도리 위치가 상층 기둥열과 일치한다. 어칸의 종도리 장여에는 상량문이 들어 있었으며 도리에는 먹으로 용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를 그려 놓았다. 공포는 상하층 모두 외 3출목, 내 4출목이다. 지붕에는 취두와 용두, 잡상을 설치하고 양성바름을 하였다.
내부에는 한 겹의 기둥열이 중앙 공간을 감싸며 배치되었다.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 안쪽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중앙부로 이곳에서 주요한 행사가 진행되며 그 바깥쪽은 호위군사가 자리한다. 이 안쪽 기둥은 상층까지 연결되어 위쪽 지붕을 받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전돌로 마감되어 입식으로 진행되는 의식에 사용하기 좋은 형태이다.
북측 벽 중앙부에는 어좌가 놓여 있다. 계자난간을 둘렀고 연잎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어좌는 사각형으로 전후좌우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국왕의 자리 뒤에는 오악일월(五嶽日月)을 그린 병풍을 세웠다. 이러한 형태의 병풍은 근정전만이 아니라 편전인 사정전을 비롯해 다른 궁궐의 정전과 편전에도 설치되어 있다. 하늘과 음양을 표상하는 해와 달, 그리고 땅을 표상하는 다섯 봉우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배경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국왕이 그 앞에 앉음으로써 우주를 구성하는 ‘천(天)·지(地)·인(人)’의 세 요소를 완성하는 의미를 담아 두었다. 어좌의 위로는 당가(唐家)를 화려하게 만들어 올렸다.
근정전의 실내는 층층이 쌓인 공포의 첨차들과 단청이 화려한 느낌을 자아낸다. 천정은 소란반자로 장식하여 국왕의 자리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일체된 공간감을 구성하였다. 소란반자의 한가운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쌍룡희주(雙龍戱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근정전은 2중의 월대 위에 놓여 있다. 월대는 건물을 위엄 있게 보이는 효과를 나타내며, 의례를 진행할 때에는 품계에 따라 자리를 구분하는 데 사용한다. 2중의 월대는 조선 궁궐 정전의 공통된 형태지만 근정전 월대는 특별히 석조 난간과 연잎 동자를 사용해서 장식하였다. 근정전 월대의 모퉁이와 난간의 법수 머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서로운 짐승[瑞獸]이 올라앉아 있다. 이들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사신(四神)’으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고, 둘째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열두 동물이며, 마지막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에 속하나 그 종류가 명확하지 않은 동물들이다. 이들 중에서 사신은 근정전 월대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 월대의 상층부에는 남쪽 계단의 법수 머리로 주작을, 북쪽에는 현무를 세웠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그 중 북편의 계단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 잡았다. 아래층 월대 난간은 대부분 십이지의 동물로 채워져 있다.
전체 권역은 중심 건물인 근정전과 근정문 그리고 동·서·남쪽의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행각은 중앙에 솟을대문으로 사정문(思政門)이 있으며 행각은 사정전 영역에서 사용하도록 문이 사정전 쪽에 있고 근정전 쪽은 화방벽으로 되어 있다. 남행각은 마당을 향한 면에 벽이 없이 기둥만 있는 월랑으로 구성되었다. 근정전 행각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동행각에는 계인문(啓仁門), 서행각에는 협의문(協義門)을 두었다. 동·서행각에는 관청과 창고가 배치되었는데 동행각에는 관광청(觀光廳), 양미고(粮米庫), 융문루(隆文樓)가 있고 서행각에는 향실(香室), 예문관(藝文館), 내삼청(內三廳), 충의청(忠義廳), 융무루(隆武樓) 등이 위치하여 용도에 따라 방이나 마루, 창고를 구성하였다.
1867년(고종 4) 중건된 이래 중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경향이 강한 편이다.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말기의 건축 기술과 조형 의식을 알게 하는 대표작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국권 침탈 이후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 주최로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행해졌다. 이때 경복궁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근정전은 건물이 철거되지는 않았으나 근정전의 행각은 전시 공간으로, 전각은 행사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교태전 등 궁궐의 주요 전각들과 함께 새로 마련된 전시관이 수용하지 못하는 물품을 전시하거나 귀빈의 접대, 행사장 등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역대 총독들은 근정전에서 행사를 개최할 때 옥좌에 자리하여 조선왕조의 대리인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궁궐지(宮闕志)』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2003.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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