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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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문무백관과 왕세자, 척신, 사신 등에게 조하(朝賀)를 받는 궁궐의 중심 건물.

개설

정전은 ‘수조하지처(受朝賀之處)’라 하여 왕이 문무백관과 왕세자, 척신에게 조하를 받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며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국가의 가장 공식적인 의례가 행해지는 전각을 가리킨다(『태종실록』 6년 1월 1일). 모든 궁궐 건축에 있어서 정전은 규모와 형태 등의 측면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며 전체의 배치도 정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이 정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의례의 중심 건물을 모두 정전이라고 칭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왕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침전(寢殿) 일곽에서도 의례의 중심이 되는 건물에 정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종묘나 경기전 등 사묘(祠廟) 건축군에서도 중심 건물의 이름이 정전인 경우가 있다. 또 왕이 임어(臨御)하는 전각에 대한 상징으로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편전(便殿)에 대해서도 정전이라고 지칭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의례를 실행했던 공간들을 분석해 보면 궁궐 내에 가장 중심이 되는 영역은 정전, 편전, 침전의 세 전각이다. 이 중 정전에서는 망궐례, 배표의 등 중국과의 외교적 의식, 정월 초하루와 동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 국왕의 탄일 등에 이루어지는 조하 의식 등 다양한 의식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정전은 그 자체로도 가장 규모 있는 전각이지만 월대와 전정, 전문과 그 앞의 마당들에 의해 극도로 높은 엄격함을 구현하고 있는 공간이다. 마당의 품계석 하나까지 철저하게 계획된 수준 높은 건축적 성취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의 정전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경희궁의 숭정전(崇政殿),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을 들 수 있다. 이들 전각의 명칭에는 일관된 규칙이 있는데, 바로 정(政) 자의 사용이다. 근정, 인정, 명정, 숭정은 모두 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 다만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선포와 관련되어 베이징의 태화전(太和殿)과 같이 화(和) 자를 사용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전각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월대 답도의 폐석(肺石), 전각 내외의 각종 상징적 장식들에서 이러한 위계의 차이가 나타난다.

정전 건축은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이들은 측면의 규모와 층수(層數)는 다양하지만 정면은 모두 5칸이다. 측면 규모는 근정전 5칸, 인정전 4칸, 명정전 3칸, 숭정전 4칸, 중화전 4칸으로 최소 3칸에서 최대 5칸이다. 전각의 내부에는 북벽 중앙에 어좌(御座)를 구성하였고 중심부의 기둥들을 생략하여 내부 공간을 확보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내부 공간에는 주로 네모난 벽돌[方甎]을 깔아 마감했는데, 근대를 지나면서 인정전과 같이 양식 마루가 설치된 경우도 있다. 정전 바닥에 흔히 전통적인 실내 공간 요소로 인식되고 있는 온돌과 마루를 놓지 않고 네모난 벽돌로 마감한 것은, 이 공간이 원칙적으로 입식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일상 집무 시설인 편전의 바닥은 마루지만 정전은 일상적 집무가 아닌 특별한 의식을 중심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입식으로 만들어졌다.

변천

고려까지의 정전은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였다. 고구려 안학궁의 정전인 외전은 정면 길이 총 143척(약 50m)에 이르는 11칸 건물이었다. 발해의 상경용천부 궁궐도 제1궁전인 금란전(金鑾殿)은 기단부 길이가 정면 55.5m에 이르는 총 11칸 건물이었고, 제2궁전은 이보다 큰 정면 약 82m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회경전(會慶殿)은 정면 길이 39.16m에 9칸 규모를 갖고 있었다.

마당에 정전을 배치하는 수법도 고려와는 달랐다. 안학궁과 발해 궁궐에서는 정전 좌우로 부속 건물이나 행각을 연접시켜 정전의 정면이 마당 북쪽면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는 중국의 역대 궁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배치 수법이며, 특히 명대 자금성의 봉천전(奉天殿)의 배치법과 동일하다. 이는 상고시대에 정치 공간인 치조(治朝)에 따로 전각을 두지 않고 천자가 노문(路門)에 나와 의례를 행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치에서의 정전은 오히려 문전(門殿)의 성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회경전에서는 정전과 북행랑이 분리되어 전각이 마당의 중심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경복궁에서는 전각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창건 당시 경복궁의 정전과 뒤쪽의 보평청(報平廳)을 연결하는 천랑(穿廊)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연결 방법은 안학궁과 고려 궁전에서도 사용된 방식이다. 천랑을 사용한 연결은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 사이의 관광청(觀光廳), 창경궁 명정전 후면의 행각 구성, 경덕궁의 숭정전과 자정전 사이의 천랑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처럼 천랑은 정전과 편전 사이의 일반적인 연결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요컨대 조선 궁궐의 정전은 규모가 축소되었다. 배치하는 수법도 애초에 행랑과 함께 앞마당을 비우던 것에서 점차 마당 한가운데의 위치를 차지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후면의 복도각도 점차 소멸되었다. 즉, 정면 5칸의 구성, 앞마당 중앙에 독립적으로 배치되는 방식은 조선시대에 들어 궁궐 정전의 일반적인 배치 수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시초인 경복궁 근정전은 애초에 5칸으로 영건되었다. 10년 후에 영건된 창덕궁 정전은 3칸의 작은 규모였지만 1418년(태종 18) 인정전을 고쳐 지을 때 5칸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 18년 7월 7일). 이후 정면 5칸의 규모는 조선 궁궐 정전의 일반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동일한 정면 5칸의 구성이라도 측면의 규모와 층수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할 때 근정전·인정전·초기의 중화전은 중층, 명정전·숭정전·재건된 중화전은 단층의 구성을 하였다. 측면 규모는 근정전 5칸, 인정전 4칸, 명정전 3칸, 숭정전 4칸, 중화전 4칸으로 최소 3칸에서 최대 5칸이었다.

정전의 전면으로는 2중의 월대가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조의 모든 정전에는 전면으로 넓은 월대를 구성하여 조하례 등 각종 대규모 행례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전정 앞에는 전문, 그리고 전문 앞으로는 조참례가 가능한 마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정전 일곽의 배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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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윤정현, 「조선시대 궁궐 중심공간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기철, 「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조재모, 「조하 의례동선과 궁궐 정전의 건축형식」,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26권 제2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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