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궐례(望闕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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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망궐례 |
한글표제 | 망궐례 |
한자표제 | 望闕禮 |
상위어 | 가례(嘉禮), 빈례(賓禮), 조하례(朝賀儀) |
동의어 | 향궐하례(向闕賀禮), 향제궐행하례(向帝闕行賀禮) |
관련어 | 망궁례(望宮禮), 망배례(望拜禮), 요하의(遙賀儀), 조회(朝會) |
분야 | 왕실/왕실의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허태용 |
시행시기 | 태조 |
시행기관 | 예조 |
시행장소 | 경복궁 근정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망궐례(望闕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1월 1일, 『세조실록』 8년 12월 29일, 『영조실록』 1년 11월 18일, 『영조실록』27년 3월 19일, 『정조실록』 10년 6월 10일, 『고종실록』 33년 8월 15일, 『세종실록』 1년 11월 27일 |
국왕이 새해 첫날 아침(正朝), 동지(冬至), 그리고 성절(聖節)에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경명나라 황제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경하(慶賀)를 올리는 예식.
개설
조선왕조는 중국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관계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사대자소란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하고, 작은 나라는 큰나라를 섬긴다는 논리인데, 조선은 국왕의 즉위시 명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는 절차를 거치고, 또 정기적인 조공을 실시함으로써 명과 사대자소의 관계를 맺었다. 아울러 새해 첫날 아침, 동짓날, 황제의 생일 등의 특정일에 왕이 궁궐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명 황제에게 경하를 올리는 예식을 정식화하였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인정하며 그 속에서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규정한다는 인식의 가시적인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례는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이나 궁궐에서 원 황제를 향하여 절을 하던 향궐배하(向闕拜賀) 의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조정에서 거행되던 정지조하의(正至朝賀儀)는 국왕이 신하들에게 경하받는 수조하(受朝賀)로만 이루어졌는데, 원 간섭기 이후 원 황제에 대한 고려 국왕의 원격지 조하, 즉 요하의(遙賀儀) 절차가 추가되었다. 이는 원나라의 외로아문(外路衙門)에서 시행되던 배하행례(拜賀行禮)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원나라를 대신한 명나라는 건국 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질서를 의례적으로 구축, 강화하려고 노력하면서 빈례(賓禮)로서의 망궐례라는 명칭을 처음 창안하였고 이를 예법을 정리한 『명집례(明集禮)』 속에 포함시켰는데 이것이 명나라와의 사대자소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정지조하의는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와 마찬가지로 망궐례와 수조하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태조실록』 2년 1월 1일; 『세종실록』 18년 1월 1일 1번째기사]) 다만 명나라에서와는 달리 빈례가 아니라 가례(嘉禮)에 편성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에 수록되었다. 빈례나 가례는 모두 오례 중 하나로, 빈례가 외국 사신과 관련된 의례를 규정한 것이라면, 가례는 왕실 관례나 혼례뿐 아니라 각종 하례 등에 관해 규정하고 있었다.
망궐례의 시행에는 그것을 통해 표상되는 종속성이 조선의 주체성과 충돌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조대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시행에 제한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지만(『세조실록』 8년 12월 29일) 16세기 이후로는 별 무리 없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한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명나라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을 중화의 자리에 올려놓는 자존의식을 강화시켜 나갔고, 이 과정에서 망궐례는 청나라의 칙사가 내방하는 시기가 절일과 겹치게 되면 행하는 시연용 의례로 퇴색하는 경향을 띄었다.(『영조실록』 1년 11월 18일) 반면에 대명의리의 차원에서 영조와 같은 경우는 명나라 태조,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기일이나 즉위일을 맞으면 망배례(望拜禮)를 빈번하게 시행하는 모습을 보였다.(『영조실록』27년 3월 19일)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는 망궐례가 극히 형식적인 모습으로만 잔존하거나 이미 멸망한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추념적인 차원의 망배례로 전환되고 있었던 한편으로, 지방관들이나 통신사행들이 왕의 상징인 전(殿) 자를 새긴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대상으로 한 원격지 요하를 망궐례로 지칭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0년 6월 10일) 그리고 마침내 대한제국이 설립되기 한 해 전인 1896년 고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지방에 설치된 전패를 궐(闕) 자를 새긴 궐패(闕牌)로 고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3년 8월 15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망궐례는 의식 이틀 전 예조가 내외의 관원들에게 직무를 다할 것을 선섭(宣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하루 전날에는 경복궁 근정전에 궐정(闕庭)을 설치하고 동시에 궐정 앞에는 향안(香案)을 둔다. 왕세자의 막차는 근정문 밖에 설치한다. 의식 당일에는 국왕의 배위(拜位), 왕세자 위(位), 종친 및 문무백관의 위를 설치하고 의식을 행할 시간을 기다린다.
북소리가 초엄(初嚴)을 알리면 궐정 앞에 황의장(黃儀仗)을 진열하고 근정문 밖에는 노부 대장(鹵簿大仗)을 동쪽과 서쪽에 진열한다. 엄(嚴)은 나라의 큰 의식이나 행사에 왕이 행차할 때 이에 참여하는 여러 관원에서 준비를 하도록 알리기 위해 세 차례 치던 북소리를 말하는데, 초엄·이엄·삼엄이 있었다. 또 황의장은 조선에서 중국 황제와 관련된 의례행사를 할 때 사용하던 의장이며, 노부 대장은 왕의 행차 때 따르는 의장이었다.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모두 조당(朝堂)에 모여서 각기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는다.
북소리가 이엄(二嚴)을 알리면 종친과 문무백관들은 모두 근정문 밖의 자리에 나아간다. 왕세자도 필선(弼善)의 인도로 근정문 밖의 막차에 도착하고 국왕은 면복(冕服)을 입고서는 사정전(思政殿)에 임어한다.
북소리가 삼엄(三嚴)을 알리면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백관들을 인도하여 동, 서쪽의 편문(偏門)을 경유하여서 자리로 나아가고, 봉례(奉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을 경유해 자리로 나아간다. 국왕은 승여(乘輿)를 타고 나아오다가 근정전 서쪽에서 내려서는 좌·우통례(左·右通禮)의 인도를 받아서 배위로 나아간다. 이렇게 되면 망궐례를 행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후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의식을 진행하는 전의(典儀)가 네 번 절하라고 외침
-좌통례가 국왕에게 “국궁(鞠躬)하여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아뢰면 국왕이 국궁하고 음악이 시작됨. 국왕은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전하에게 꿇어앉기를 아룀. 국왕은 꿇어앉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의례에서 향을 담당하는 사향(司香) 2인이 향안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향을 세 번 올리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뒤로 물러남
-의식을 총괄하는 좌통례가 국왕에게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아뢰면, 국왕이 그와 같이 하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좌통례가 국왕에게 “국궁하여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하면, 왕이 그에 따라 하고 음악이 시작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국왕에게 “규(圭)를 꽂고 몸을 굽혀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무도(舞蹈)를 세 번 하고 꿇어앉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세 차례에 걸쳐 절을 하는 삼고두(三叩頭)를 하시라고 함. 국왕이 그 말대로 따르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좌통례가 국왕에게 산호(山呼)를 부르기를 계청하면, 국왕이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고서 “만세(萬歲)” 하고, 좌통례가 산호를 계청하면 다시 “만세” 하며, 재산호를 계청하면 “만만세”라고 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산호는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을 담아 손을 치켜들고, ‘만세’ 또는 ‘천세’를 크게 외치는 의식이었음
-좌통례가 국왕에게 “규를 내어 쥐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하시라.”고 하면, 국왕이 그에 따라 행하고 음악이 시작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의식이 끝났음을 아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인 성절에는 망궐례만을 거행하였으나 새해 첫날과 동지에는 망궐례와 수조하가 함께 거행되었는데 순서상으로 명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먼저하고 나서 국왕에 대한 수조하가 거행되었다. 특히 조선 국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망궐례와 수조하의 단계마다 신하와 군주의 변화된 위상으로 의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국왕의 복장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망궐례를 행할 때 국왕은 황제를 조근(朝覲)하고 조서를 받을 때 착용하는 면복을 착용함으로써 자신을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 상정하였지만 수조하를 행할 때는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신하들로부터 조현(朝見)을 받는 군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게 된다.(『세종실록』 1년 11월 27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참고문헌
- 『國朝五禮儀』
- 『銀臺條例』
- 『通文館志』
- 강제훈, 「조선초기의 朝會 의식」, 『조선시대사학보』28, 조선시대사학회, 2004.
- 윤석호, 「조선조 望闕禮의 중층적 의례구조와 성격」, 『한국사상사학』43, 조선사상사학회, 2013.
- 임민혁, 「조선 초기 遙賀儀와 군신질서」, 『조선 왕실의 嘉禮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0.
- 정은영, 「조선통신사와 망궐례」, 『조선통신사연구』5, 조선통신사학회, 2007.
- 최종석, 「고려시대 朝賀儀 의례 구조의 변동과 국가 위상」, 『한국문화』51,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0.
- 한형주, 「조선초기 朝賀儀禮에 대한 고찰」, 『명지사론』13, 명지사학회,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