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전(思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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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에 창건하여 고종대에 중건한 건물로 경복궁에서 왕이 정무를 보는 전각.

개설

1395년(태조 4) 경복궁의 편전으로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보평청이었으나 곧 왕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이 사정전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대에는 내전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세종대에 사정전 일곽을 확장하고 독립성을 가지도록 재구성했다.

고종대에 중건한 사정전 일곽은 중심 전각인 사정전과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나란히 있으며 행각으로 둘러싸인 동·서로 긴 장방형의 공간이다. 사정전 남행각에 솟을대문인 3칸의 사정문이 있다. 사정문이 있는 행각은 창고[庫]로 천자문의 글자를 따서 천자고(千字庫)에서 월자고(月子庫)까지 순서를 매겨 놓았다. 이 창고에는 궁궐과 왕실에 관련된 각종 기록문서와 책자를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 행각은 방(房), 청(廳), 주(廚)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행각에는 협선당(協善堂)과 용신당(用申堂), 숭현문(崇賢門)이 있고 동행각에는 연태문(延泰門), 건인각(建寅閣), 사현문(思賢門)이 있다. 북행각에는 중앙에 강녕전(康寧殿)의 남문인 향오문(嚮五門)이 있으며 향오문 동쪽에는 안지문(安至門), 서쪽에는 용교문(用敫門)이 있다. 북행각은 강녕전 쪽에서 사용하며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북쪽에 있다. 『태조실록』의 창건 기사에는 “정사를 보는 곳[視事之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정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에게 깊이 생각하여 정치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 전각은 매일 아침 정사를 보는 곳으로, 수없이 닥쳐오는 일들을 전하에게 아뢰면 전하는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니 더욱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설명했다(『태조실록』4년 10월 7일). 따라서 사정전은 국왕이 정사를 보는 편전이라는 성격을 그 이름에서부터 나타내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시에는 연침(燕寢)인 강녕전과 보평청(報平廳)인 사정전이 하나의 일곽에 천랑(穿廊)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태조실록』에는 보평청은 정면 5칸,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칸씩이라고 되어 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보평청은 경복궁을 창건하고 각 전각의 명칭을 짓기 전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명칭이었다.

조선초기 세종은 오례(五禮)의 제반 의례(儀禮) 절차를 확립하였고 이러한 의례의 정비 과정에서 중요하게 된 전각이 사정전이다. 오례 중에서 궁궐에서 거행되는 각종 의례는 왕이 사정전에서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오는 것에서 시작하여 행례 장소에서 의례를 마치면 사정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행사를 마치기 때문이다. 즉, 사정전은 국왕에게 의례가 시작되는 장소이자 끝나는 장소인 것이다.

또한 중국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매일 아침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기에 앞서 의례를 행하는 상참(常參)을 문무직관이 날마다 하도록 제도를 법제화하면서, 이 같은 의례에 적합하도록 1429년(세종 11)에 사정전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세종실록』11년 1월 9일). 이 중수 공사 이후로 국왕은 사정전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했으며 상참(常參), 온짐연(溫斟宴), 다례(茶禮) 등의 다양한 의례가 사정전에서 이루어졌다. 세종대에 편전에서 이루어지는 상참의 의례가 정비되자 강녕전 남쪽에 행각을 설치하여 강녕전과 사정전 영역을 명확히 분리하였고, 이후로 사정전은 외전의 영역에 들게 되었다.

연산군 이후에는 상참이 축소되기 시작하고 왕의 학문 수양과 정사 논의가 결합된 경연(經筵) 제도가 확립되었고 중종대 이후에는 사정전에서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 등의 경연, 소대(召對)와 조계(朝啓)를 했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승하하자 빈전(殯殿)을 사정전에 설치했으며(『인종실록』1년 7월 1일), 1553년(명종 8)에는 대내의 큰 화재에 사정전이 소실되었으나(『명종실록』 8년 9월 14일) 그 이듬해 재건되었다.

사정전의 좌·우에 있는 전각으로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다. 만춘전은 사정전 동쪽 전각이며 천추전은 서쪽의 전각이다. 만춘(萬春)과 천추(千秋)는 각각 오래고 영원하다는 의미와 오행의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국가의 기틀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두 전각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23년 천추전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423년(세종 5)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 창건 기록에는 사정전을 내전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사정전은 북쪽으로는 강녕전, 남쪽으로는 근정전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근정전 북행랑의 북쪽에 동·서로 또 천랑이 있었다. 세종대에 사정전을 다시 짓고 강녕전을 넓히면서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는 행각이 생기고 침전과 편전 구역이 명확히 나뉘게 되었다. 편전인 사정전이 침전인 강녕전과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은 세종대의 의례 정비와 편전에서의 의례 증가에 따른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사정전 행각의 바깥쪽에 있었는데 고종대에 중건하면서 두 전각은 행각 안쪽 사정전 좌·우에 위치하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의 화재 시 사정전은 무사했으나 동·서 행각이 소실되었으며 1888년(고종 25)에 재건되었다. 현존하는 사정문과 남행각, 사정전, 천추전은 1867년 건립된 것이고 만춘전은 6·25전쟁 시에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다시 복원했다.

형태

고종대에 사정전을 중건할 때 조선 초기와 같은 이름으로 같은 위치에 중건하였다. 1867년(고종 4)에 중건된 사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외부 기둥에는 전부 창호를 달았고, 내부에는 칸막이 없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어좌는 어간의 북쪽으로 치우쳐 고주 뒤에 놓이고 어좌 앞으로 고주 4개만이 있어서 내부 공간이 상당히 넓다. 즉 외부는 5칸이지만 내부 공간은 3칸의 구성을 하고 있다. 어좌는 후면 고주 뒤쪽에 놓였다.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이나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에는 전면에 월대가 있는 데 반하여 사정전에는 월대 없이 전면 기단 중앙과 좌우에 계단만 놓여 있으며 중앙의 계단에만 소맷돌이 있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형식이며 세부 수법은 근정전과 같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에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다.

세종대에 사정전 일곽이 강녕전과 분리되면서 사정전 동·서 행각 외부에서 만춘전과 천추전이 사정전을 보좌했다. 고종대에 중건하면서 사정전 행각 내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평면 구성은 두 전각이 거의 같으나 천추전은 측면이 툇간을 포함하여 4칸이고, 만춘전은 3칸이다. 정면은 6칸으로 중앙에 청(廳) 2칸과 동·서에 각각 온돌방이 1칸씩 있으며 4면에 툇간이 있는 평면이다. 사정전의 부속 건물이므로 사정전에 비하여 격을 많이 떨어뜨린 형태로서 기둥도 각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공포는 익공이고 지붕 장식도 양상도회를 하지 않고 용두만을 설치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37년(세종 19) 주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만춘전 동쪽 내정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천추전에서는 문종이 승하했다.[『단종실록』총서 ]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북궐도형(北闕圖形)」
  • 김동욱, 「조선초기 경복궁 수리에서 세종의 역할」, 『건축역사연구』제11권 제4호, 2002.
  • 김동욱, 「조선초기 창건 경복궁의 공간구성-고려궁궐과의 관계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제7권 제2호, 1998.
  • 조재모, 「조선왕실의 정침 개념과 변동」,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20권 제6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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