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례(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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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나 국가 차원에서 행해지던 차를 마시는 의례.

내용

한국의 차문화(茶文化) 역사는 멀게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에 대한 정사(正史)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로 “흥덕왕 3년(828)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씨를 가져와 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는데, 차는 이미 선덕왕 때부터 있었고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하였다. 차가 단순히 일상음료의 범위를 넘어 정신을 닦는 수양 음료로서도 마셨음을 『삼국사기』는 전한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가야와 신라시대부터 널리 퍼졌고,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의례도 발달했다.

차를 마시는 의례나 차를 이용한 종교 의례는 보통 차례(茶禮) 또는 다례(茶禮)로 불렸다. 차(茶)나 다(茶)는 근본적으로 같은 뜻인데 이렇게 발음을 달리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볼 때 왕실 차원의 차 의례나 국가 차원의 차 의례는 대체로 다례로 불렸음에 비해 민간에서의 차 의례는 대체로 차례로 불렸다. 따라서 본 사전에서도 다례는 왕실이나 국가 차원의 차 의례를 대상으로 하였다.

한국의 차 문화는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더욱 발달하여 다양한 다구의 사용과 함께 차가 하나의 귀중한 예물로 대접받기까지 했다. 고려의 조정과 왕실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 때 다례를 행했다. 국가적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 정조(正朝) 때,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심지어 신하의 사형 판결 의식에도 다례를 거행하였다. 왕비와 태자 등을 책봉할 때, 공주를 시집보낼 때, 원자의 탄생을 축하할 때, 군신의 연회 의식 등에 차를 올리는 진다(進茶) 의식을 행했다. 관청에서는 다시(茶時)가 있어 관리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차를 마셨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차의 소용이 늘어나자 다방(茶房)과 다군사(茶軍士)와 같은 차를 담당하는 관청과 군사를 따로 두기까지 했다.

고려시대의 다 문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배불정책으로 퇴조하긴 했지만 왕실과 조정, 선비, 승려들 사이에서는 계속 이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1405년(태종 5)에는 한양의 모든 관청에서 다시를 정해놓고 차를 마셨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매일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는 시간을 두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다례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1401년(태종 즉위)으로,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다례’를 행한 것을 『태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다례 용어의 숫자는 691번이며, 여기에 차와 관련된 다방(茶房), 다담(茶談), 주다례(晝茶禮), 진연(進宴)과 같은 용어까지 합치면 그 횟수는 무려 1,958회에 이른다.

특히 조선시대의 궁중다례는 공식적인 왕실의례로 행해졌기 때문에 국가의 공식 기록에 관련 내용이 풍부하게 전한다. 궁중다례(宮中茶禮)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궁중에서 거행된 모든 다례라 할 수 있다. 즉 공적이든 사적이든 왕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거행되었던 접빈다례를 비롯해 돌아가신 망자에게 올렸던 다례까지 포함해 궁중에서 행했던 모든 다례를 궁중다례라 부를 수 있다.

궁중다례는 크게 중국의 사신과 같은 칙사나 종친 등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접빈다례(接賓茶禮), 명절이나 왕 또는 대비의 회갑 등 왕실의 경사에서 공식적으로 거행된 진연다례(進宴茶禮), 국상(國喪)이나 진전(眞殿)과 궁묘(宮廟) 및 제사 등에서 차를 올리는 제향다례(祭享茶禮)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궁중다례는 국빈 접견, 궁중 연향, 궁중 제향 등에서 공식적으로 시행된 왕실의례로, 고려시대 보다 엄격한 정형미를 갖춘 궁중의 최고급 문화였다.

중국 칙사를 대상으로 한 접빈다례의 기본 골격은 『세종실록』「오례」의 가례(嘉禮)빈례(賓禮)에 처음 규정된다. 그 후 접빈다례는 성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가례와 빈례에서 그 형식과 내용이 완성된다. 이러한 궁중다례는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조선전기보다 더 독립된 의식으로 치러졌다.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다례의 행례 절차를 자세하게 기록한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다례 장소를 비롯해 참여 인원과 역할, 침전과 다방에서의 준비물, 음식 가지 수,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다례 장소 또한 대궐 침전으로 경복궁 강녕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환경전, 경희궁 융복전, 덕수궁 함녕전 등이며, 왕이 생활하는 시어소(時御所)로서 온돌방이 있는 건물에서도 다례를 행했다. 이처럼 궁중다례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의식 절차로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은 조선후기 들어 접빈다례의 중요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국조오례의』 단계에서는 가례 항목의 ‘영조서의(迎詔書儀)’와 ‘영칙서의(迎勅書儀)’에서, 또 빈례 항목의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에서 칙서를 맞이하거나 칙사를 대접하는 의례 절차의 한 부분으로서 ‘다례 절차’가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정전다례(正殿茶禮)’, ‘편전다례(便殿茶禮)’, ‘하마다례(下馬茶禮)’ 같은 독립된 다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례 의식에 음악이 곁들여 짐으로써 ‘다례 의식’ 자체가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의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접빈다례와 함께 궁중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궁중진연(宮中進宴)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궁중 의궤이다. 궁중잔치인 진연에서도 ‘진다의식(進茶儀式)’이 추가됨으로써 궁중다례는 더욱 중요시되었다. 진연다례란 명절이나 회갑 등 왕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베푸는 궁중잔치에서 거행되는 진다(進茶) 의식을 이른다.

진다의식은 18세기 후반 궁중에서 거행된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의 일부로 나타난다. 이러한 진다의식은 영조 때 간행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정조 때 편찬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실리게 된다. 1828년(순조 28)과 1829년(순조 29)의) 진작의궤(進爵儀軌)와 진찬의궤(進饌儀軌)에는 연회일과 참석자, 배치, 배설, 품목에서부터 진열 과정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왕과 왕세자 등의 다상(茶床)과 다구(茶具)도 나와 있다.

조선후기 진연에서의 진다의식이 거행된 직접적인 배경은 영조 때의 금주령이었다. 이러한 금주령으로 술을 마신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종묘 제사에서조차 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자연히 술을 금하다 보니 궁중잔치에서도 술 대신 차를 사용하면서 차의 사용이 늘어나 다례 또한 풍부하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서 행해진 다례는 그 의식 절차가 중국의 다례가 아닌 조선의 접빈의례 및 진연의식에서 사용되던 의례가 사용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궁중다례는 찬란한 궁중 문화일 뿐만 아니라 조선 자체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독특한 조선의 전통문화였다.

용례

조선후기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면 의례적으로 다례를 거행했다. 예컨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1784년(정조 8) 정조의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상이 말하기를, ‘날씨가 몹시 춥고 때가 이미 늦었습니다. 몇 그릇의 다과(茶果)를 간략하게 준비했습니다. 다례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삼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다례를 행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명호・이근우 외, 『조선시대 궁중다례의 자료해설과 역주』, 민속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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