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전(殯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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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후가 승하하고 5개월 뒤 발인(發靷)할 때까지 왕 또는 후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두는 전각.

개설

『예기(禮記)』에 천자는 승하한 뒤 7개월 만에, 제후는 5개월 만에, 대부(大夫)·사(士)는 3개월 만에 무덤에 가서 장례를 치른다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의 왕은 중국 천자 다음의 제후에 해당하므로 승하한 뒤 5개월 만에 발인했는데, 발인할 때까지 관을 넣어두는 곳이 빈전이었다. 빈전은 별도의 전각을 새로이 짓지 않고 기존에 있던 전각 중에서 택하였고, 빈전 이름도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

왕이나 왕후에 대해 빈전이라고 한다면, 세자와 세자빈, 후궁 등은 빈궁(殯宮)이라 일컬었다. 전통시대 예(禮)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등급을 구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시신을 넣어두는 전각을 가리키는 명칭 또한 이렇듯 구분했던 것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왕이나 왕후에게 빈전이 아닌 빈궁이라고 쓴 기록도 있다. 태종의 경우 그의 시신을 넣어둔 전각을 빈궁이라고 일컬었다.

연원 및 변천

오례(五禮)의 의주(儀註)를 마련해서 동아시아 예제의 전범(典範)이 된 국가 전례서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였다. 그런데 당(唐)나라의 이의부(李義府)·허경종(許敬宗)이 국가의 흉사(凶事)는 신하들이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국장(國葬) 기록 자체를 없애고 기록 또한 하지 않았다. 명(明)나라의 『대명집례(大明集禮)』를 편찬할 때까지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중국 황실의 기록에서 빈전의 설립 및 운영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 대신 『대당개원례』에 당나라 벼슬아치[品官]들의 상례 과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조선 왕실의 국장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이 기록에 ‘빈소(殯所)’, ‘빈당(殯堂)’, ‘빈(殯)’ 등의 용어가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고려사(高麗史)』에서 ‘빈(殯)’, ‘빈전(殯殿)’이라는 용어가 확인된다. 『고려사』에는 오례 중 흉례(凶禮)가 실려 있고 국가의 장례인 국휼(國恤)이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휼에 관한 의식은 당나라처럼 제정하지 않고 ‘나라에 큰 변고가 있으면 모두 임시로 고전을 참고하고 전례를 인용하여 일을 치렀으며, 일이 끝난 뒤에는 꺼리고 전하지 않아 역사에 나타난 것은 다만 대체적인 것 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고려 왕실에서 빈전을 운영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396년(태조 5)에 승하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국상에서부터 빈전 기록을 볼 수 있다. 빈전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 국가 전례서에 분명하게 제시한 곳은 없지만 왕이나 왕후의 상장(喪葬) 의례인 국장을 치를 때 빈전을 설치하여 발인할 때까지 빈전에서 거행한 의례들을 알 수 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1898년(광무 2) 연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흉례 항목이 있으나 국장 절차는 싣고 있지 않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에서 빈전을 운영했는지는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의 국장 후 『고종태황제빈전혼전주감의궤(高宗태太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를, 순종의 국장 후 『순종효황제빈전혼전주감의궤(純宗孝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를 각각 작성한 데서 국장이 발생했을 때 빈전을 설치하고 운영했음이 단적으로 입증된다.

절차 및 내용

왕이 승하하면, 햇솜을 왕의 입과 코 사이에 얹어서 숨이 끊어졌는지를 확인한 뒤 안팎으로 곡하였다. 내시(內侍)는 왕이 평소 입던 웃옷을 매고 지붕에 올라가 왕의 몸에서 떠난 혼(魂)을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다. 이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사자(死者)에게 일체의 의복(衣服)을 갈아입히는 습(襲)을 행하였다.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는 소렴(小歛), 입관하는 대렴(大歛)을 마친 뒤, 왕 혹은 왕비의 시신을 안치한 재궁을 궁궐에 미리 마련해 둔 빈전에 봉안하였다. 재궁은 이후 발인 때까지 빈전에 봉안되어 있었다.

왕이 승하하고 5개월째 되는 그 달에, 빈전에 봉안되어 있던 재궁을 상여인 대여(大轝)에 싣고 궁궐을 떠나 장지인 산릉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면 역할이 끝난 빈전은 해체되고, 그와 관련하여 빈전해사제(殯殿解謝祭)를 지냈다. 이후 빈전으로 사용했던 전각은 본래의 용도로 되돌아갔다.

빈전에서 거행된 의례는 1758년(영조 34)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랐다. 『국조상례보편』이 조선 왕실의 상장 의례를 정비한 최종 결과물이었고, 이후에 편찬된 정조대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과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국조상례보편』의 내용을 수록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각 왕과 왕후의 빈전을 설치한 상황은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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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 『고종태황제빈전혼전주감의궤(高宗태太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
  • 『순종효황제빈전혼전주감의궤(純宗孝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
  •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 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고전연구회, 1972.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춘관통고(春官通考)』,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7.
  • 이현진,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서울학연구』43, 2000.
  • 정유미, 「조선시대 궁궐의 상·장례 공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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