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판(協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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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중앙 관서에 소속된 각 관서의 부(副) 책임자.

개설

협판(協辦)은 1882년(고종 19) 11월에 설치된 통리아문(統理衙門)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 다음 달에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이 다른 명칭으로 변경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설치된 내무부(內務府) 등에 등장하는 직위명이다. 각각의 관서와 함께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 등이 정식 명칭이었다. 곧 협판은 이 시기 신설된 내·외아문의 직위로서 독판(督辦)이라는 직명과 함께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갑오개혁 이후에는 육조(六曹)를 변경하여 신설된 각 아문과 각 부(部)에서 대신 다음의 직위로 협판을 두었다. 대체로 협판은 해당 관서의 책임자인 독판이나 대신의 지휘를 받아 해당 관서를 총괄하는, 조선시대로 보면 육조의 참판, 오늘날의 경우 정부의 차관에 비견된다.

담당 직무

임오군란 이후 갑오개혁 전까지의 협판은 군국 기무와 교섭 통상 관련 신설 아문 소속 각 사(司)의 책임자인 독판의 지시를 수행하는 실무자였다. 독판은 정·종1품인 반면 협판은 정·종2품이었고 협판의 아래인 참의(參議)는 정3품이었다. 독판·협판·참의가 각 부서를 이끌던 당상관이었다. 전통적인 육조 질서와 병존하면서 협판은 1880년대의 개화·자강 정책을 추진하던 내·외아문에 소속된 고위 관리였다. 이들 중에는 통리기무아문 계통의 기구에 근무하거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인사들이 다수였다. 때문에 이들은 국제 정세에 비교적 밝고 개화 지향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협판은 미·일 양국의 공사관원으로 발탁되어 자주 외교의 실무자로 활약하였다. 또 일부 협판은 왕의 두터운 신임 속에서 중앙과 지방 군영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왕권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외무협판묄렌도르프([穆麟德], Mṏllendorf, P.G. von)나 내무협판데니([德尼], Denny, O.N.)와 같이 외국인이 협판에 기용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또 협판 가운데에는 역관에서 출세한 중인(中人) 신분이나 서얼(庶孼) 신분의 인물도 있었다. 협판은 후일 독판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협판은 왕의 측근 세력, 민씨 척족, 개화파 관료 등으로 구성되어 개화·자강 정책 추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변천

협판의 직위는 전면적인 관제 개혁이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전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통적인 육조 질서와 내·외아문이 해체되고 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군무아문, 학무아문, 법무아문, 공무아문, 농상아문의 8아문과 궁내부로 바뀌면서 협판은 해당 관서의 종2품의 칙임관이 임명되었다. 이듬해 내부, 외부, 탁지부, 군부, 학부, 법부, 농상공부의 7부(部)와 궁내부로 관제 개정이 이루어진 뒤에도 협판의 관직명은 그대로였다.

갑오개혁으로 등장한 8아문 체제에서 각 아문에서의 협판 역할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고종실록』 31년 7월 14일). 이에 따르면, 각 아문의 책임자였던 대신 아래에 위치한 협판은 대신의 명령으로 각 아문의 사무를 왕에게 아뢰거나 정부 회의에 참석하였다. 또한 소속 관사에 명령을 발하는 등 서리대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즉, 협판은 대신이 사정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 혹은 대신의 지시로 대외적으로 해당 아문을 대표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 협판은 각 부마다 있는 총무국장이 되어 각 부를 관장하며 소속된 각 국(局)과 각 과(課)를 감독하고 각 부의 사무를 정리하는 책임이 있다고 규정되었다.

총무국장을 맡게 된 협판은 8아문 단계에서는 아직 설치되지 않은 각 국의 업무를 총괄·관장하면서, 해당 아문의 대신이 직접 제시한 문서나 기밀 사무를 담당하고 관리의 임명·퇴직을 맡았다. 대체로 총무국에는 각 국에서 만드는 문서의 성안과 초안을 심사하는 문서과, 각 아문과 왕복하는 문서를 발·수신하는 왕복과, 각국과의 통계 자료를 정리하여 이를 대신이 살펴볼 수 있도록 한 다음 관보국에 보내 『관보』에 게재되도록 하는 보고과, 마지막으로 각 아문의 사무 문안을 모아 편찬하는 기록과 등 모두 4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협판인 총무국장은 문서를 살펴보다가 긴요한 안건이 있으면 해당 대신에게 보고하고, 일반적인 안건일 경우에는 해당 주무국장과 협의하여 살펴본 후 문서를 발송하도록 하였다. 또 총무국장은 각 국에서 작성한 문서에 이의가 있으면 해당 국에서 개정할 것을 명령하거나 혹은 대신의 지시를 받들어 각 국장을 지휘할 수 있었다.

1895년(고종 32) 3월 내각제로 개편되면서 각 관서에서 협판의 역할은 크게 변하였다(『고종실록』 32년 3월 25일). 협판은 대신이 사정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 대신을 대리하되 그 직무 권한은 대신과 동일하게 하도록 규정되기만 하였다. 1894년의 관제 개혁 당시 협판이 총무국장을 맡으면서 수행하던 역할은 완전히 사라졌다. 즉, 문서의 발·수신, 기밀문서의 관리, 관리의 임명과 퇴직 명령, 관서의 도장 보관, 통계·조사 등의 업무를 맡던 총무국의 역할은 대신의 지위와 역할이 강화된 내각제로 개편되자 대신관방으로 흡수되고 만 것이다.

협판은 대신을 도와 각 부의 사무를 정리하며 각 국의 사무를 감독하도록 한다는 규정은, 달리 말하면, 독자적인 자기 역할이 없고 대신이 자리를 비운 경우 그를 대신했을 때만 부각되는 직위라는 뜻이었다. 각 부의 실질적인 업무는 각 국과 과가 담당하였고, 그 총괄은 대신관방의 몫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1896년에 다시 의정부가 복원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곧 대한제국기 각 부 내에서 협판의 역할은 대신의 지휘를 받는 보좌 직위로 축소·제한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에 여러 차례의 정치 파동과 인사 개편 과정에서 협판으로서 대신을 대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협판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었다. 1907년 6월 관제 개혁 과정에서 협판은 차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 국회도서관, 1970.
  • 김필동, 「한국 근대 관료의 초기 형성 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 1881~1894」, 『사회와역사』 50, 1996.
  • 전미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 24·25, 1989.
  • 한철호, 「민씨 척족 정권기(1885~1894) 내무부 관료 연구」, 『아시아문화』 12,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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