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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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세자 및 비빈, 공신, 2품 이상의 대신, 유현(儒賢) 등이 죽은 후에 그의 공덕을 기려 시법(諡法)에 따라 내리는 이름.

개설

시호의 의미는 둘로 구분된다. 큰 의미의 시호는 왕 등이 죽은 후에 내리는 이름인 묘호(廟號)휘호(徽號), 시호, 존호(尊號)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시호 안에 작은 의미의 시호가 포함되어 있다.

시호의 전통은 왕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시호는 해당자의 공덕을 평가하여 글자를 정했는데, 그 제도는 시법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시호는 죽은 이의 생전 행적의 선악을 살아있는 이들이 평가하여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권선징악과 포폄(褒貶)의 의미가 있었다.

시호는 예조의 계제사(稽制司)에서 담당했다. 대신들이 모여 삼망을 정해 왕에게 올리면, 그중의 하나를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시호의 글자 수는 두 자였으며, 왕은 네 자였다. 이것이 세종부터는 8자로 늘어나 그 이후 고정된다.

내용 및 특징

시호는 시법에 의거하여 정해졌다. 시법의 연원은 중국 고대 주나라까지 소급된다. 『사기』「시법해(諡法解)」를 보면, 최초의 시법은 주공단(周公旦)에 의해 만들어졌다. 주공단이 태공망(太公望)의 공을 기려 시호를 올리고, 시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호는 본래 시와 호가 서로 의미를 달리하고 있는 합성어이다. 시(諡)는 행위의 자취요, 호(號)는 공(功)을 나타낸다. 시를 들으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시는 경대부(卿大夫) 이상의 지위에 있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왕의 시호는 왕이 훙서한 후에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와 조선에서 올린 시호 2종이 있었다. 시호의 제정 원리인 시법을 보다 깊이 연구하여 제도적으로 확립시킨 때는 세종대였다. 당시의 시법을 소개한 자료로는 『시법총기(諡法總記)』가 있다. 이선(李選)이 편집한 이 책에서는 시법의 시행과 의의 및 변화 등을 살피고, 「역대시법석의(歷代諡法釋義)」라 하여 주공의 시법부터 소순(蘇洵)의 시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특히 주공시법은 시 자의 뜻을 다시 분명하게 해석하고 『의례경전통해』의 시법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소개하고 있다.

시호와 관련된 제반 업무는 예조의 계제사가 담당하였다. 시호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관료들은 시·원임(時原任) 2품 이상의 중신들이었다. 시호를 의논하는 날은 일관(日官)이 점쳐서 정하였다. 이때 시호뿐 아니라 묘호·전호·능호도 아울러서 의논하였다. 삼공이 삼망(三望), 즉 세 가지 후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여 의시함(議諡函)을 예방승지(禮房承旨)가 들고 들어가 국왕 앞에 올렸다. 국왕은 삼망단자를 살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시호의 글자 위에 점을 찍었다. 첫 번째로 추천한 이름인 수망(首望)으로 낙점하는 것이 보통이나, 부망(副望) 혹은 말망(末望)으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모두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다시 논의에 부쳤다. 그와 동시에 국왕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를 참작하여 새로 작성한 삼망단자에 부표하여 올리면, 국왕은 최종 낙점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올리는 시호를 종묘에 청하는 것은 천자를 대신하여 조상이 내리는 형식을 빌리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의 왕에게는 종묘에 모셔진 조상이 시를 내렸던 것이다. 열성의 시호는 끝에 상례로 효(孝) 자를 사용했다. 이것은 종법에서의 부자관계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시호의 표창은 왕실이나 가문의 영예로 치부되어 선시(善諡)를 얻고자 하는 관습이 주류를 이루었다. 시법의 정신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이름의 겉치레만 남은 것이다.

의의

시호에는 죽은 자의 공덕 평가에 엄정했던 조상들의 역사의식, 후대 왕들과 수많은 대신들의 고심과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은 그 제도가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호에서 배울 점이 있다. 사람이 남기는 이름에는 역시 역사의 철저한 평가가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백호통(白虎通)』
  • 『사기(史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시법총기(諡法總記)』
  • 임민혁, 「묘호의 예제원리와 조선의 수용」, 『국사관논총』1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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