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日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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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 관측과 천변(天變) 현상의 해석을 담당하던 관직.

개설

일관(日官)은 대체로 고대에서는 관직명으로, 고려·조선에서는 별칭으로 주로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관과 일자(日者)를 혼용하였으며, 오히려 일자로 쓰인 용례가 더 많다. 일관 혹은 일자는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지칭한다.

담당 직무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던 당시에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유방택(柳方澤), 노을준(盧乙俊) 등 11명에게 포상하였다. 모두 일관으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천시(天時)를 삼가 점쳐서 대위(大位)에 오르기를 권고한 그 공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태조실록』 2년 7월 29일). 이들은 고려말 서운관 소속 일관들이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도 계속 직임을 맡았던 인물들로 보인다.

일관은 천문 관측과 점후(占候)·역산 등 천문 역법의 전문 분야뿐만 아니라, 기양(祈禳)·택일·상지(相地)·풍수·제례 등 시간과 공간의 제반 분야에서도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천 고유를 행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을 보면, “조선 국왕 신(臣)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조준과 우정승김사형 및 판삼사사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중략) 일관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가 오래되어 쇠해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태조실록』 3년 12월 3일). 이와 같이 땅의 기운이 쇠한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의 천명적 근거를 일관의 말을 빌려 합리화하고 있다.

일관은 천변이 있을 때면 이를 불식하는 기양 의례를 올려야 한다고 왕에게 청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태종 때에는 달이 목성을 범한 변고가 있다 하여 일관이 기양하기를 청하였으며(『태종실록』 11년 1월 5일), 금성이 3일간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부엉이가 창덕궁 서쪽 모퉁이에서 울자 일관이 이를 기양해야 한다고 청하였다(『태종실록』 11년 1월 26일).

일식이 일어나 구식(救蝕) 의례를 거행할 때면 일관은 북을 울렸다. 1413년(태종 13) 왕이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원일(元日) 별제(別祭)를 시행하고, 일식의 변고로 인해 향궐하례(向闕賀禮)와 조회하는 일을 정지하였다. 이날 정오 무렵 왕이 소복으로 갈아입고 정전의 월대(月臺)에 나오자 일관이 북을 울려 구식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태종실록』 13년 1월 1일). 이때의 일식은 오정 3각(刻)부터 시작하여, 신초(申初) 2각에 이르러 복원(復圓)되었다. 이 일식 지속 시간을 계산하면, 12시 45분에서 3시 30분까지이니 2시간 45분가량 진행된 셈이 된다. 이때는 수시력에 의한 1일 24반진 100각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1반진은 평균 4.17각이며, 현재 시분으로 환산하면 1각은 14.4분이 된다. 이는 조선후기 시헌력의 1일 96각제에 의한 1각 15분제와 대략 비슷한 값이어서 이것으로 환산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런데 1434년(세종 16) 7월 1일 보루각 자격루에 표시된 시각제는 1일 12시에, 매 시는 8각과 초정의 여분을 아울러 100각이 되고, 매 각은 12분으로 나눈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매 반진은 4각의 48분과 초정의 2분을 합한 50분으로, 1일 12시 24반진 100각 1200분제가 된다. 현재 시분제는 1일 24시 1440분제이므로, 과거 1분이 현재 1.2분에 대응한다. 이에 정밀하게 환산하면, 앞서의 오정 3각은 12시 43.2분이고, 신초 2각은 3시 28.8분이 된다. 개기일식의 지속 시간은 최장 7분 40초이며 부분일식의 경우는 최대 약 3시간 내외이므로, 위 1413년 1월 1일의 일식은 부분일식임을 알 수 있다.

일관은 풍수지리설의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세종 때 승지허후(許詡)가 시강(侍講)하는 중에, 최근 일관최양선(崔揚善)의 의견에 따라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을 보토(補土)한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풍수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산맥이란 본래 천연(天然)의 형세가 있는 것인데, 산맥의 장단(長短)을 보충해 무엇 하며 국운의 길고 짧은 것이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세종은 이미 시작한 일이니 정지하기에는 늦었다고 답변하였다(『세종실록』 20년 4월 15일). 여기서 일관최양선은 주산인 북악산의 내맥 보토를 건의한 풍수지리설의 전문가로 묘사되어 있다. 세종 때에는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이 완성되었고, 동부승지(同副承旨)이순지(李純之)가 발문을 붙였다(『세종실록』 27년 3월 30일). 이를 보면 일관의 역할이 어떤지를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천문으로는 칠정(七政)과 열사(列舍), 중외관(中外官) 별자리의 입수도와 거극도분을 모두 측정하였고, 또 고금 천문도의 동이(同異)를 참작하고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였으며, 이에 그 28수(宿) 도분(度分)과 12차의 수도(宿度)를 일일이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개수(改修)한 뒤 이를 석본(石本)으로 간행하였다.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 『수시력』, 『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 『통경(通徑)』의 여러 책을 나란히 수교(讎校)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편찬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을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오는 것을 살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은 취하여 부문별로 유취(類聚)하여 한 질의 책으로 만들어 열람하기 편하도록 하였다.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궁구하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 근면하려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관은 관측 이론에 관련한 천문과 역법 분야뿐만 아니라 측정 기구에 관련한 의상(儀象)과 해시계와 물시계인 구루(晷漏) 분야에도 두루 전문적 식견을 갖추어야 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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