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전(文昭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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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초상화를 모시는 원묘(原廟).

개설

태조는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인소전(仁昭殿)을 조성하였다(『태조실록』 7년 11월 11일). 이후 태조가 승하하자 태조의 혼전으로 사용하면서 문소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태종실록』 8년 8월 26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하면서 진전(眞殿)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1420년(세종 2)에 태종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혼전으로 광효전(廣孝殿)을 조성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9일). 2년 뒤 태종이 승하하자 광효전에서 태종의 혼전 의례를 행하고 이를 마친 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신주는 종묘에 부묘하였다. 광효전에는 위패와 초상화를 만들어 모시고 종묘 의례와 달리 평소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음식을 올리고 제사 지냈다. 이와 같이 본래 태조를 위한 문소전과 태종을 위한 광효전이 따로 운영되었는데, 1431년(세종 13)에 원묘의 제도를 논의하기 시작하여 1432년 문소전에 광효전을 합쳐서 원묘를 단일화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29일). 이후 문소전에서는 태조와 그 위로 4대를 합친 다섯 신위를 영구히 모셨다. 그리고 후대 왕이 왕위를 전해 준 선대를 문소전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 문소전은 종묘와 별도로 운영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소실될 때까지 이어졌으나, 임진왜란 이후 재건되지 않았고, 원묘제 또한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본래 창덕궁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1432년(세종 14) 광효전과 합하여 경복궁 북쪽에 조성되었다. 태조와 신의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다가 원묘제에 따라 태조와 그 위로 4대의 신위를 모셨다.

변천 및 현황

문소전은 1432년(세종 14) 경복궁에 건립되기까지 여러 변화를 겪었다. 원래 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실 당시는 경복궁의 별전(別殿)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이때는 원묘의 개념이 아니라 신의왕후의 혼전(魂殿)이었다. 신의왕후의 신주를 태조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기까지 궁궐 안에서 모시기 위해 임시 설치한 것이다. 태조는 한씨가 조선을 개국하기 1년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죽자 개국 이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칭하였다. 1393년(태조 2) 11월에 삼년상을 마치고, 1398년 11월에 추존(追尊)하여 신의왕후로 삼았으며 여기에 초상화를 봉안하고서 인소전이라 이름 하였다.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하고 태종이 개경에서 머무는 동안 신의왕후의 초상화는 개성의 광명사(廣明寺)로 옮겨 모셨다. 1405년(태종 5) 11월에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경복궁의 세자전(世子殿)에 모셨다. 이때까지는 다른 건물을 임시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1406년(태종 6)이 되어서야 인소전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5월 27일에 왕이 창덕궁 북쪽에 인소전을 새롭게 지으려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였다. 유한우(劉旱雨)가 “창덕궁주산(主山)의 기운이 이 땅에 모였는데, 만약 땅을 파서 집을 지으면 반드시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직(李稷)을 불러 의논하니, “주산(主山)의 맥(脈)이 아니고 따로 궁륭(穹窿)의 모양으로 나와서, 남향의 형세를 이룬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가까운 땅을 골라서 진전을 지으려면 이곳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 하여 터 닦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해 8월 22일 창덕궁 북쪽에 인소전이 완공되었으며 신의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당(佛堂)도 함께 조성되었다. 이때 박자청(朴子靑)이 공사를 주관하고 감독하였다고 한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가 승하하자 8월 26일에 창덕궁의 인소전을 문소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9월 9일 태조를 건원릉(健元陵)에 장사 지내고 우주(虞主)를 문소전에 모셨다. 이날부터 태조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칠우제와 졸곡제를 이곳에서 지내고 1410년(태종 10) 5월 24일 대상제(大祥祭)를 지냈다. 7월 15일에는 담제(禫祭)를 지냈다. 7월 26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7월 29일에 태조와 신의왕후의 진용(眞容)을 문소전에 봉안하였다. 이를 세종 연간까지 운영하였으며,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죽자, 문소전의 전례에 따라 광효전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태종과 태종 비 원경왕후의 위패와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 지냈다.

이때 문소전에는 불당이 있었는데, 1419년(세종 1)에 각 도 승려들이 부처의 뼈와 사리를 헌상하자, 이를 문소전의 불당에 모아 두었다. 그해에 명나라 사신으로 황엄(黃儼)이 오자 그를 문소전 내불당으로 불러 석가여래의 사리 4개와 본국에서 고른 사리 550개를 내보이기도 했다. 1423년(세종 5)에는 신녕궁주(愼寧宮主) 신씨(辛氏)가 이곳에서 불경을 금으로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문소전이 조선초기 궁궐 내 중심 불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32년(세종 14) 1월 6일 안숭선(安崇善)의 상소에 따라 옛 원묘의 제도를 상고하여 문소전과 광효전을 합쳐 경복궁 북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16일). 이때 조성된 모습이 현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서례」에 그려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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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문소전과 광효전을 합하여 원묘를 조성하였으니 명칭을 새롭게 고민하여 봉성전(奉誠殿)이라 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의 반대와 유교국가라는 명분에 의해 1433년(세종 15)에는 창덕궁에 원래 있던 문소전의 불당을 철거하고, 불상을 비롯한 여러 불교 의례에 관련된 물건들을 흥천사(興天寺)로 보냈다.

형태

세종대에 문소전을 전당후침(前堂後寢)의 제도에 따라 설립하였다고 한다. 『국조오례의』「서례」에 기록된 문소전의 그림에서와 같이 3칸 규모의 전전(前殿)이 있고 그 뒤에 5칸 규모의 후침(後寢)이 있으며, 그 사이를 이어주는 복도각이 있다. 평소 후침에 신위를 모셔 두었다가 제사가 있을 때 전전으로 신위를 모셔 왔다. 세종대 기록된 『문소전의궤(文昭殿儀軌)』에 따르면 후침 5칸에는 고(高)·증(曾)·조(祖)·고(考)와 태조의 5위(五位) 신주를 봉안하고, 대제(大祭)를 올릴 때에는 전전 3칸에 모두 모셔 제례를 올렸다. 또 신주를 봉안할 때 태조는 북쪽에 두어 남향하게 하고, 소 2위(昭二位)는 동쪽서 서향하게 하며, 목 2위(穆二位)는 서쪽에서 동향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