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청(朴子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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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57년(공민왕 6)~1423년(세종 5) = 67세]. 조선태조~세종 때 활동한 무신. 우군 도총제부 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를 지냈다. 본관은 영해(寧海)이고 거주지는 개성, 서울이다. 황희석(黃希碩)의 보종(步從) 출신이다.

고려 우왕~조선 태조 시대 활동

고려 말 내시(內寺)로 출사하여 낭장(郎將)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그가 1393년(태조 2)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임금의 아우 의안대군(義安大君)이화(李和)가 들어가려 하니,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자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뒤에 호군(護軍)에 임명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이내 내상직(內上直)을 명하여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하여 선공 소감(繕工少監)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호익사 대군(虎翼司大軍)으로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야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태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 2) 공조 전서(典書)와 예조 전서가 되었다. 그 뒤 첨총제(僉摠制)가 되었다가 1404년(태종 4) 3월 삼도 체복사(三道體覆使)가 되었다. 1405년(태종 5) 10월 이궁(離宮)을 지을 때 감독한 제조(提調)였기 때문에 이직(李稷) · 신극례(辛克禮)와 함께 안마(鞍馬)를 각각 하사받았다. 1407년(태종 7) 2월 새로 문묘(文廟)문소전(文昭殿)을 짓는데,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과 중군 총제(中軍摠制)로서 명을 받고 그 역사(役事)를 동독(董督)하였다. 그 해 5월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고, 그 해 6월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었다.

1408년(태종 8) 3월 공안부(恭安府)판사(判事)로 있을 때 전지(田地) 40결(結)을 하사받았다. 그 해 5월 초순에는 선공 소감홍리(洪理) 등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 남지(南池)의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역도(役徒)들이 피로해 지쳐 열흘이 넘도록 성취하지 못하자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 달인 5월 하순에 국장도감(國葬都監) 판사가 되고, 6월에는 조묘도감(造墓都監) 제조가 되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10월에는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제릉(齊陵)·건원릉(健元陵)의 역사를 감독하였다. 1409년(태종 9) 8월 삼군 진무소(三軍鎭撫所)를 두었는데, 이때 상진무(上鎭撫)가 되었고, 9월에는 공조 판서로서 의흥부(義興府) 지사(知事)를 겸하였다.

1410년(태종 10) 2월 군자감(軍資監)을 용산강(龍山江)에 짓는데, 공조 판서로서 역사(役事)를 동독(董督)하였고, 4월 해풍군(海豐郡)의 흥교사(興敎寺) 탑(塔)을 연경사(衍慶寺)로 옮기고, 송림현(松林縣)의 선흥사(禪興寺) 탑(塔)을 개경사(開慶寺)로 옮기는데 공조 판서로서 그 역사를 동독하였다. 이때 역부(役夫)는 위병(衛兵)으로 하였다. 5월 흥천사(興天寺)의 탑(塔)을 수리하였는데 공조 판서로서 그 역사를 대언(代言) 박습(朴習)과 함께 동독하였다. 그 해 7월 공조 판서 겸 아ㅣ흥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에는 문묘(文廟)에 비(碑)를 세웠는데, 변계량(卞季良)이 쓴 비문에는 성산군이직과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박자청이 역사를 감독하였다고 하였다.

1411년(태종 11) 1월 공조 판서로서 한경(漢京) 곧 서울에 가서 각각 대장(隊長) · 대부(隊副) 5백명씩과 정부(丁夫) 3천명을 거느리고 남산(南山)과 태평관(太平館)의 북쪽에 무릇 20일 동안 소나무를 심었다. 그 해 3월에는 누각(樓閣)과 침실(寢室)을 창덕궁(昌德宮)에 짓고, 진선문(進善門) 밖에 석교(石橋)를 놓았는데, 이때 공조 판서로서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 해 8월에는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해 윤12월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였는데, 공조 판서로서 성산군이직과 의정부 지사이응(李膺)과 함께 제조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4월 새로 큰 누각[大樓]를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는데, 이때 공조 판서로서 감독하였다.

1413년(태종 13) 6월 의정부 지사가 되고, 8월 의정부 지사로서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 제조가 되었고, 그 달에 충청도 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가 되었으며, 10월에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었다. 1414년(태종 14) 1월 공조 판서가 되었고, 6월 마장(馬場)을 흥인문(興仁門) 밖에 수축(修築)하였다. 1415년(태종 15) 7월 우군 도총제가 되고, 11월 좌군 도총제로서 명(明)나라 서울인 남경(南京)에 가서 동인도(銅人圖)를 준 것을 사례하였다. 그 해 12월 한성부 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 8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고, 그 해 10월 우군 도총제부 판사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3월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축조를 감독하였으나 명령과 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에 4월에 하옥되었다가 파면되고 수원(水原)으로 귀양갔다가 5월에 사면되었다. 그 해 9월 다시 우군 도총제부 판사가 되고, 10월 선공감(繕工監)제조(提調)로서 태평관의 어실(御室)을 지었다. 1420년(세종 2) 5월 영의정유정현(柳廷顯)과 함께 살곶이내[箭串川]의 돌다리 놓는 일을 몸소 감독하였다. 1421년(세종 3) 2월 판부사(判府事)로서 헌릉(獻陵)에 도랑을 파고 버드나무를 심는 것을 감독하였고, 7월에는 인정전(仁政殿)을 수리하는 역사를 감독하면서 망새[鷲頭]를 무너뜨려 떨어지게 하였으므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파면되었다. 그 해 12월에 또 다시 우군 도총제부 판사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좌군 도총제가 되고, 그 뒤 우군 도총제 판부사가 되었다가 그 해 11월 9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7세이었다.[『세종실록』세종 5년 11월 9일 「박자청 졸기」]

성품과 일화

박자청의 성품에 대하여는 『태종실록(太宗實錄)』과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태종실록』에는 그는 성질이 까다롭고 급하여, 매양 역사(役事)를 감독하면 빨리 이루고자 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부를 재촉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으나 공역(工役)을 능히 이루므로 주상에게 총애를 받았다라고 하였다.[『태종실록』태종 7년 10월 8일, 태종 12년 5월 14일]『세종실록』에는 그의 사람 된 품이 세밀 각박하고, 은혜와 덕이 적었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른 특이한 재능이 없었으나, 다만 토목(土木)의 공역을 관장한 공으로 사졸로부터 나와 1품의 지위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세종 5년 11월 9일 「박자청 졸기」]

시호와 후손

시호는 익위(翼魏)이다. 자녀는 1남을 두었는데, 1남은 박질(朴質)이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