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同知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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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중추원·추밀원·밀직사 등과 의금부·경연 등에 소속되어 다른 관원이 겸하던 2품 관직.

개설

동지사(同知事)는 고려 이후 등장한 직제로, 중추원을 비롯해 중추원이 개편된 밀직사, 밀직사가 개편된 자정원과 춘추관 등에 설치되었다. 설치 관서에 따라 동지원사(同知院事), 동지사사(同知司事), 동지관사(同知館事) 등으로 불렸다. 관서마다 품계가 달라 자정원은 정2품이었고, 중추원이나 추밀원·밀직사·춘추관은 종2품이었다. 한편 공민왕대에 내시부가 신설되면서 역시 동지사를 두었는데, 이때는 정4품 품계에 정원은 2명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문무백관 관제 반포 시 중추원에 4명, 경연관에 2명을 두었고 모두 종2품이었다. 1409년(태종 9) 삼군진무소를 의흥부로 개편한 뒤 동지사를 두기도 하였다. 이후 세조대인 1466년(세조 12)에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동지원사를 동지사로 개칭하였고, 춘추관의 동지관사 역시 동지사로 바꾸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돈녕부를 비롯해 의금부·중추부·경연·성균관·춘추관 등에 동지사가 규정되었으며, 중추부는 7명이 정원이었고 돈녕부는 1명, 나머지 성균관과 춘추관 등은 2명씩이었다. 의금부만은 동지사가 독자적인 정원을 갖고 있지 않고 판사·지사·동지사 합해서 4명이었는데, 만약 정2품에게 제수되는 지사에 종2품이 제수되면 동지사는 1명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동지사는 통상적으로 ‘동지(同知)’라는 글자를 관서명 앞에 붙여 호칭하는데, 예를 들어 동지중추부사·동지영돈령부사 등과 같다. 돈녕부 이외의 다른 관서 동지사는 모두 다른 관원이 겸직하였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에는 동지사가 판사나 지사처럼 비록 겸직이지만 관서의 업무에 개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돈녕부나 중추부의 경우 명예직으로 특별한 직무가 없었으나, 의금부나 성균관·춘추관·경연 등에 소속한 동지사는 해당 부서의 업무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동지경연사의 경우 경연에 참석하여 진강(進講)하였고, 동지의금부사는 왕이 참석하는 친국(親鞫)에 참석하여 죄인을 심문하였다. 한편 동지중추부사의 경우는 지사와 함께 순장(巡將)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동지춘추관사는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이 완성되면 이를 사고(史庫)에 봉안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7년 1월 9일).

변천

동지사는 『경국대전』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관서의 개편 과정 속에서 정원이나 운영상에 일부 변화가 있었다. 『속대전』에서는 부제학과 도승지가 경연의 동지사를 겸직하여, 좌석의 배치에 문제가 있을 경우 경연의 동지사를 해임하도록 규정되었다. 『대전통편』에서는 부제학과 도승지가 동지춘추관사를 겸직하면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 직을 해임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대원군 봉사손(奉祀孫)의 경우 처음에 도정(都正)에 제수했다가 승품(陞品)하게 되면 돈녕부의 동지사 또는 지사에 제수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100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는데, 이때는 추가로 관직을 만들어 제수하게 하였다.

1882년(고종 19) 훈련원에 동지사 4명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1894년에는 의금부를 의금사로 개편하고 이를 법부 아문에 속하게 하면서, 협판이 겸임하는 동지사를 두었다. 이후 1900년에 귀족원(貴族院)을 돈녕원으로 개칭하면서 갑오개혁 이후 개편된 관료 제도의 최고 직계인 칙임관(勅任官)급으로 동지사가 설치되었으며, 정원은 1명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