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찬관(修撰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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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春秋館) 소속 정3품 관원.

개설

수찬관(修撰官)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당대의 정치 상황을 기록하고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겸직의 관원이었다. 고려시대에 수찬관의 겸관은 관품에 따라 임명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역사학에 밝은 인물을 임의로 뽑아 겸직시켰다. 조선의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수찬관은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원 중 해당 품계의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수찬관은 춘추관 당상관으로서 승지(承旨)와 홍문관 부제학이 담당했다.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규정된 수찬관은 승정원 승지 6명과 홍문관 부제학 1명이었다. 정3품관이라도 당상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승지나 부제학은 왕의 비서이자 경연 관청인 홍문관의 책임자로서 국정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긴요한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찬관은 각각의 견문에 근거하여 널리 알릴 만한 왕의 말과 행동, 신하들이 아뢰거나 의논한 것 중에 득실에 관계된 것을 모두 기록·고찰·징험(徵驗)하여 이후 평가의 증거로 남기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수찬관은 지난 일의 상황에 대한 명백한 내용들을 기록하여 초안을 만들고 월별로 제목을 달아 사관(史館)의 궤에 넣어 봉했다. 이를 월별로 정리하여 일력(日曆)을 만들고, 매년 점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수찬관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사관(史官)으로서 수찬관이 갖는 고유한 임무였다. 실록청이 개설되면, 춘추관 지사(知事)동지사(同知事)를 도와 각 방(房)의 당상을 맡아서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지휘했다. 사관이 작성한 사초(史草)에서 필요 없는 글자나 글귀를 지우는 산삭(刪削) 과정도 지휘했다.

『조선왕조실록』 편찬 단계에서는 짧은 시간에 편찬 인력이 집중되어야 했기 때문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관원 외에 사직(司直) 등 군직(軍職)을 받은 관원도 수찬관에 임명되어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 때 편찬된 『성종실록』의 경우처럼 편찬관에 수찬관이 없을 때도 있었다.

변천

『고려사』「백관지(百官志)」에 따르면 수찬관은 한림원(翰林院)의 3품 이하가 겸직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수찬관의 본직을 조사해보면 이러한 규정과는 달리 정3품에서 종6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직에서 수찬관을 임명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직제는 고려의 제도를 대체로 계승하였다. 1392년(태조 1)의 관제 개혁에서는 충수찬관의 관직이 빠진 채 충편수관만이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당시에 충수찬관이 실제로 활동하였던 기록이 있어, 충수찬관이 충편수관과 별다른 차이 없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대에는 수찬관을 정3품 지신사(知申事)가 겸직하였다. 성종대에 이르면 수찬관은 춘추관의 정3품 당상직으로서 승정원·홍문관 부제학 이하가 겸임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수찬관이 같은 겸직이지만 이전과는 달리 관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과 홍문관 등 특정 관직에 의해 겸임되도록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택와 허선도 선생 정년 기념 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편, 『택와 허선도 선생 정년 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정구복, 「고려시대의 사관과 실록 편찬」, 『제3회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1984.
  • 한우근,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 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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