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承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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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서로 왕명을 출납했던 승정원(承政院) 정3품 당상관 관원.

개설

승지(承旨)는 승선(承宣)·대언(代言)·용후(龍喉)·후설(喉舌)이라고도 한다. 승지는 고려시대까지는 중추원(中樞院)에서 왕명 출납을 관장했다.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와 중추원을 의정부와 삼군부로 개칭하면서 승정원을 독립시켰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3품 아문인 승정원에 소속된 승지는 도승지 이하 좌·우승지, 좌·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모두 6명이 있었다. 이들은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의 입이 되어 왕명을 대신 전달하는 직무를 띠고 있었다. 승지는 왕명의 출납뿐 아니라, 각각 육조(六曹)를 맡아서 국정 운영을 매개하는 행정과 정책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나오는 승지의 역할은 왕명 출납이다. 하지만 승지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국정 논의에 참여하고, 6조사 분방(分房)·시종(侍從)·지방으로의 출장[出使]·사신 접대·집사(執事)·숙직과 기타 겸직(兼職)의 임무 등을 광범위하게 수행했다.

이 가운데 승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왕명 출납 기능이었다. 이는 단순히 왕과 각 관서와 신하들 사이의 매개 역할만이 아니었다. 관서와 신하들이 올린 정사(政事)·상소(上疏)를 왕에게 올릴지 결정하고, 올릴 내용을 간추리며 이와 관련된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올리는 상소부터 이조(吏曹)의 품계(稟啓),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계(論啓)에 이르기까지 모두 승정원을 거치게 되어있었다. 이런 문서들이 『승정원일기』에 남도록 주서(注書)를 감독하는 것도 승지의 일이었다.

승지가 정식 통로를 거쳐 국정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방법은 또 있었다. 승지는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근시(近侍)로서 왕의 모든 행차에 참여했다. 승지와 사관 없이는 왕이 신하를 만나지 못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제도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하는 장치는 승지의 분방이었다. 분방이란 6명의 승지가 1명씩 6조 중 한 관서를 나누어 맡는 것이다. 담당하게 된 관서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지시를 각 관서에 전달하며, 각 관서의 대신과 해당하는 관서의 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때로는 해당하는 관서의 대신에게 제약을 가하고 관서의 일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405년(태종 5) 이전, 5승지 체제에서는 이조·병조(兵曹)·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를 분방했고, 형조는 지형조사(知刑曹事)가 관장했다. 1405년에 동부대언이 신설되고 세종 때에는 동부승지가 신설되어 6승지 체제가 정비된 후에는 형조까지 승지가 나누어 관장했다. 도승지가 이방을 담당하며, 나머지는 승지의 서열에 따라 육조를 나누었다. 그러나 왕의 정책적 판단이나 승지의 자질, 형제나 부자가 언관에 같이 임용되는 것을 막는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융통성 있게 분방했다. 도승지는 승정원 장관(長官)으로서 다른 방의 업무에도 관여했으나 좌승지 이하의 도승지 분방에 대한 간여는 엄격하게 금지했다.

시종은 근시인 승지의 주요 업무였다. 시종이란 왕명 출납에 관련된 업무는 물론, 조계(朝啓)·시사(視事)·신하의 면대·연회·관사(觀射)·강무(講武)·행행(行幸)·신병 치료 때에 왕을 시종하는 것이다. 또한 승지는 양계(兩界) 등지에 파견되어 지방관과 장수의 노고를 위로하고, 민정·군정을 규찰했다. 왕을 대리하여 사신을 영접·접대·환송하고 왕의 부묘(祔廟)·친사(親祠) 때는 집사로 참여했다.

이렇듯 승지는 국정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겸직하고 있는 관직도 많았다. 우선 여섯 승지는 모두 춘추관 당상관인 수찬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수찬관은 이들 승지와 홍문관 부제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승정원 주서도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정원 관원 전원이 겸직이었던 셈이다. 춘추관이 정3품 아문이 된 것도 춘추관 겸임관 중 실질적인 정치의 사실 기록을 담당하는 관원의 최고 관직이 춘추관 수찬관인 승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승지는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을 겸직하기도 했다. 동시에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사명(辭命)의 담당 관청인 예문관의 직제학(直提學)도 도승지가 담당했고, 모든 승지가 지제교(知製敎)였다. 도승지는 이외에도 상서원(尙瑞院) 정(正)도 담당했다. 또한 승지 중 한 명이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전옥서(典獄署)의 부제조를 겸직했다.

변천

고려시대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하면서 중추원에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지주사(知奏使)와 좌승선·우승선·좌부승선·우부승선 각 1명을 두었다. 1276년(고려 충렬왕 2)에는 승선을 승지로 개칭했다. 승지의 품계는 고려초 이래 정3품이었다. 단, 1298년 4월에 충선왕이 사림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를 도모하면서 왕명 출납을 사림원에 위임하여 도승지는 종5품, 일반 승지는 종6품으로 잠시 품계가 낮아졌다.

고려 때 도승지 또는 지주사·지신사 이하 승지는 위로 판중추원사 이하 추신(樞臣)과 함께 중추원 관원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집무처로 승지방 또는 승선방·대언방이 있어 추신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왕명 출납을 관장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0년에 중추원이 삼군부(三軍府)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이 독립했다. 1401년(태종 1) 다시 의흥삼군부와 합쳐져 승추부로 하고 승지를 대언으로 바꾸었다. 그때까지는 5승지 체제를 유지했다. 1405년 1월에 동부대언을 신설하여 6승지 체제로 했고, 관제 개혁 때 승정원을 다시 독립시키면서 승정원 지신사와 대언을 도승지와 승지로 바꾸었다. 이것은 갑오개혁 때 승정원을 궁내부 승선원으로, 도승지 등을 도승선으로 개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승지의 위차는 도승지 이하 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순이었다. 품계는 모두 정3품 당상관이지만 고종 때 간행된 『은대조례(銀臺條例)』에 따르면 품계 간 서열이 엄격했다. 좌승지 이하는 관대(冠帶)를 착용하지 않으면 도승지를 보지 못하고, 좌승지 이하의 자리는 한결같이 일찍이 거쳤던 자리의 순서에 따른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승지의 임명은 도승지 이하에 결원이 생기면 좌승지 이하가 차례로 승진하고 최하위의 승지만을 발령하도록 했지만, 이런 규례는 상황에 따라 변수가 많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은대편고(銀臺便攷)』
  • 『은대조례(銀臺條例)』
  • 박홍갑·이근호·최재복, 『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산처럼, 2009.
  • 이동희, 「조선초기 승정원의 정치적 역할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전해종, 「승정원고: 『은대조례』와 『육전조례』를 통하여 본 그 임무와 직제」, 『진단학보』 25·26·27, 1964.
  • 정만조, 「『승정원일기』의 作成과 史料的 價値」, 『한국사론』 37, 2003.
  • 한충희, 「조선초기 승정원 연구: 실제 기능과 통치기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59,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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