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承政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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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비서 기구.

개설

대언사(代言司)·은대(銀臺)·정원(政院)·후원(喉院)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승정원은 국왕 및 다른 관서와의 관계 등에 따라 위상과 기능이 변화하기는 하였으나, 왕명 출납을 주도하였고, 국왕의 시신(侍臣)으로 국왕을 시종하며 이조·병조의 인사 등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소속 관원인 주서에 의해 작성된 『승정원일기』는 당대 국정 운영의 전모를 밝히는 데 유효한 자료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00년(정종 2) 4월 중추원 승지가 승정원 승지로 개칭되면서 승정원이라는 관서가 처음 등장하였다. 이는 왕세자로 있던 이방원이 취한 조치로, 당시 재상들의 합좌기구인 도평의사사에 참여하던 중추원은 군사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관서였으나, 왕명 출납기능을 분리해 승정원을 설치함으로써 재상들의 정치권력 분산을 도모하였다. 승정원은 1401년(태종 1) 7월 승추부가 설치되면서 한때 혁파되었다가 1405년(태종 5) 승추부가 혁파되면서 복설되어 독립된 관서로 존재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승정원의 전신인 중추원는 2품의 추신(樞臣)과 정3품의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 각 1명과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도승지 이하가 왕명 출납을 관장하였다. 1400년 승정원이 설치되면서 중추원 승지는 승정원 승지로, 중추원 당후는 승정원 당후로 개칭되었다.

1401년 승정원이 일시 혁파되는 가운데 직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다만 명칭만 변경되어 도승지는 지신사(知申事)로 개칭되었고 다른 승지는 대언(代言)으로 바뀌었다. 1405년 승정원이 다시 설치되면서 지신사를 포함한 5대언에게 이조·병조·호조·예조·공조를 각각 관장하게 하고 형조의 관장을 위하여 동부대언을 추가 설치함으로써 6대언 체제, 즉 후일 6승지 체제의 모습을 갖추었다. 1433년(세종 15) 지신사가 도승지로, 대언이 승지로 다시 개칭되었으며, 그 결과 『경국대전』에는 정3품 당상의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각 1명과 정7품 주서 2명으로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승정원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가주서(假注書)·사변가주서·수정가주서·수궁가주서 등의 이름으로 가주서가 설치되었으며, 이 가운데 사변가주서는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정규 직제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승정원의 기본 임무는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왕명 출납이었다. 육조를 비롯한 예하 속아문(屬衙門)의 각종 보고 및 관료의 상소 등은 승정원을 경유하여 국왕에게 보고되었고, 국왕이 각 관서에 내리는 명령 역시 승정원을 경유하여 하달되었다. 6승지가 각각 육조 가운데 한 관서를 관장하는데, 이는 육승지방단자(六承旨房單子)에 국왕이 기입하여 결정되며 이를 분방(分房)이라 하였다. 만약 해당 관서 관원과 상피(相避) 관계가 있거나 국왕의 특지가 내리면 담당 관서가 바뀌기도 하는데 이를 환방(換房)이라 하였다.

승정원 소속 관원은 또한 국왕의 시신(侍臣)으로 궁내에서 숙직하며, 국왕의 거둥 시에는 이를 시종하고, 국왕의 문의에 대해 자문하거나 국정 운영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인사 운영에도 관여하였고, 궐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관리하였으며, 조보(朝報) 발행을 주관하였다. 이 밖에 과거에 시험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각종 의식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거나, 전향(傳香)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6승지 모두가 경연의 참찬관과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였고, 도승지는 특히 사초(史草)를 관장하는 예문관의 직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옥쇄나 마패 및 관인(官印) 제조를 담당하는 상서원 정을 당연직으로 겸하였다. 이 밖에도 국왕의 낙점을 통해 내의원·상의원·사옹원의 부제조를 겸하며, 형방 승지는 전옥서 제조를 겸하였다.

한편 정7품 주서의 경우 『승정원일기』 편찬을 주관하였다. 주서는 주요 임무가 국왕의 모든 일과를 현장에서 바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사관이나 다를 바 없다. 주서에게 춘추관 기사관을 당연직으로 겸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서를 선발하는 기준 역시 사관만큼이나 엄격하여, 자천제인 주천(注薦)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사관들의 자천제인 한천(翰薦)에 대응하는 것이다.

승정원의 관서는 경복궁 월화문 밖에 있는데 후에 불탔으며, 이 밖에도 창덕궁 인정전 동쪽 연영문 안쪽과 창경궁 금마문 남쪽, 경희궁 건명문 안쪽 등에 있었다.

변천

승정원의 기능이나 위상은 왕권을 비롯해 다른 관서와의 관계, 그리고 정치 운영 구조 등에 영향을 받는다. 육조 직계제를 실시하며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던 태종대에 승정원은 국왕의 전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왕의 뜻에서 벗어나는 대간들의 계사 전달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대간을 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의 진언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정원은 강력한 왕권 구축을 위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종대 중반 의정부서사제가 부활하면서 승정원 기능의 약화가 추진되어, 승정원을 단순히 신하들의 보고 사항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 역할로 제한하려고 하였다. 이후 세조대 후반 원상제하에서 승정원의 위상은 다시 강화되었다.

한편 16세기 이후 사림 세력이 진출하면서 승정원의 역할이나 위상에도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승정원과 국왕의 중간에서 왕명 전달 등의 역할을 수행하던 내시나 액정서 관원들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승지들이 국왕의 면전에서 행하는 친계체제(親啓體制)로 전환을 시도하였다. 친계체제는 1519년(중종 14)에 한때 시행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기묘사화로 중단되었다.

사림 세력은 더하여 승정원에 언관의 역할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로 봉환(封還) 기능이 관행화되었다. 봉환이란 국왕의 전교(傳敎)나 비지(批旨) 등을 도로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은 국왕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내재된 것이며 결과적으로 국왕의 판단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는 것이다. 봉환은 17세기에 이르면 승지들의 고유 역할로 정착되었다. 뿐만 아니라 승지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는 승정원이 국왕의 신임을 전제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데에서 변화하여 국왕과 사림 세력의 중간에서 의견을 절충하며 당대 정치운영의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영·정조대에 이르면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국왕의 측근으로서 역할이 강화되었다. 승정원은 1894년(고종 31) 승선원(承宣院)으로 개편되면서 혁파되었다.

의의

조선시대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 기구로 왕권의 유지와 함께 신료들과 국왕의 사이에서 논의를 절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중추원에서 군사 업무와 왕명 출납 기능을 주로 관장하던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 별도의 비서기구로 승정원이 독립했다는 것은 관료제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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