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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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기록하여 배포하던 관보(官報).

개설

조보(朝報)는 조정의 소식을 전해주는 전근대적인 신문 형태로 관보와 비슷하다. 조보는 사용하는 주체나 목적에 따라 달리 구분하여 조지(朝紙), 기별(奇別), 기별지(奇別紙), 긔별, 긔별지, 경기(京奇), 경보(京報), 분발(分發), 난보(爛報), 관보, 저보(邸報), 저지(邸紙), 저장(邸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내용 및 특징

조보는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승정원은 매일 아침 처리된 일을 적어서 배포하였는데, 이때 조보에 실을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조보소, 즉 기별청에 내려보냈다. 조보는 기별서리들이 베꼈으며, 기별군사를 통하여 주요 인물을 비롯한 각 기관에 발송하였다. 한성부와 한성부에 가까운 관청은 당일에 조보를 받아볼 수 있었으나, 지방관청은 닷새나 열흘 간격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조보의 배포 대상은 원칙적으로 삼공·판서, 한성부와 중앙 각사의 장(長), 지방의 감사, 수령 및 군사 기관의 장 등 현직 관리와 전직 고급 관리들이었다. 일부 사대부들도 비공식적으로 조보를 입수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인들은 거의 접근하기 힘들었다. 조보는 조보체(朝報體) 또는 기별체라 하여 한문 초서체이면서 조보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글자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조보에는 해당 날짜에 이루어진 왕과 왕실에 대한 안부 및 대답, 왕의 거둥, 왕의 명령과 지시를 포함하는 전교, 왕이 관민에게 보내는 교시 및 윤음(綸音) 등 왕과 왕실에 직접 관련된 행사 등을 실었다. 또한 당면 정책 및 중요 문제들에 대한 유생과 관료들이 건의한 소장(疏章)과 그에 대한 왕의 비답(批答), 중앙 및 지방의 관서에서 왕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와 복명서에 관한 기사, 암행어사의 보고서 등을 담았다.

그 밖에 관리의 임명과 사직 등의 인사 문제, 그에 따른 숙배, 급유(給由), 관상감이나 지방관이 보고한 측우 기록 및 천체의 변화에 대한 관측, 천재지변과 같은 재이(災異)를 포함한 특이한 자연 현상 및 일강(日講)의 시행 여부와 강관(講官), 대외적·군사적인 문제를 포함한 변방의 문제 등 국가 운영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조보는 이처럼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당대의 정치적인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매개체였으나 중요한 사안은 싣는 것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조보는 왕과 왕실의 동정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좁은 의미의 조보 외에 도목정(都目政)을 비롯한 인사 기록을 담은 정사(政事), 왕에게 올린 상장(上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보를 넣은 봉투 앞면에는 ‘모관개탁(某官開坼) 승정원공사(承政院公事)’라고 쓰고, 뒷면에는 ‘모년모월모일(某年某月某日) 이모일지(以某日至) 소차동봉(疏箚同封)’과 같은 내용을 썼다.

조보는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양을 필사하여 제공해야 했으며, 그에 따른 비용도 적지 않았다. 중앙관청에서는 경비를 따로 요구하였고, 지방에서는 조보채를 거두기도 하였다. 조보는 소식을 전하는 것 외에도 사초로도 이용되었고, 각 기관에서 기록을 정리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왕에게는 조보를 정서(正書)하여 바쳤다. 어람정서조보서리(御覽正書朝報書吏)가 있었음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으며, 조보를 정서한 도서들도 남아있다.

선조대에 일반인이 의정부와 사헌부에서 조보를 활자화하여 간행하도록 허락한 적이 있으나, 사적으로 간행하는 문제와 조보가 다른 나라에 유출되는 것을 염려하여 다시 필사하도록 하였다. 조보는 관보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짧은 기간이지만 관보와 별도로 조보가 따로 작성된 예도 있다.

변천

조보의 기원에 대해서 차상찬(車相瓚)은 『조선신문발달사』에서 신라시대로 추정하였으나, 조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종대에 조보가 작성되었음을 언급한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필사한 것을 배포하였고, 선조대에 잠시 의정부와 사헌부의 조보를 활자로 찍어 배포하다가 다시 필사하여 배포하였다. 1895년(고종 32) 2월 이후 관보가 조보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의의

조보는 현대의 신문 개념이 없던 시기에 중앙의 소식을 중앙의 관리와 지방의 관리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대량으로 제작하지 못하였지만, 중앙 정치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신문의 기능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난보(爛報)』
  • 『조보(朝報)』
  • 『보취(報聚)』
  • 『내각항식(內閣恒式)』
  • 『난선(爛選)』
  • 최승희, 『증보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 박정규, 「조선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신문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2.
  • 양진석, 「국민대 소장 조보의 특징」, 『학예연구』 1, 2000.
  • 차배근, 「우리나라 조보에 대한 신문학적 분석고」,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 학보』 17,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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