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옥서(典獄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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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옥(獄)에 수감된 죄수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서.

개설

전옥서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의 관리와 감독을 담당하던 관서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어 1894년(고종 31)에 감옥서(監獄署)가 설치되면서 혁파되었다. 수감자의 실태에 관해 정기적으로 조사해서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죄수 중 병이 있는 자는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등 의료 기관에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옥서는 1392년(태조 1) 7월 28일 처음으로 관제를 제정해 발표할 때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의 전옥서를 계승하여 설치된 것으로, 죄수의 수감과 관리 등에 대한 일을 관장하였다.

조직 및 역할

전옥서의 관원은 1392년 발표 당시 종7품의 영(令) 2명, 종8품의 승(丞) 2명을 비롯해 사리(司吏) 2명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에 영은 승으로, 승은 부승(副丞)으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18일). 이 밖에도 이예(吏隸)로 열쇠 관리와 관련한 쇄장(鎖匠)을 두었고(『세조실록』 2년 12월 7일), 서리(書吏) 4명과 군사 10명을 배속하였다. 전옥서는 1405년(태종 5) 육조(六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속사(屬司)와 속아문제(屬衙門制)를 제정할 때 형조(刑曹)의 속아문이 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전옥서의 주 임무는 수감된 죄수의 감독으로, 해당 관청의 숙직 관원은 제향이나 시위(侍衛) 및 조참(朝參)을 제외하고는 간수(看守)하는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4일). 한편 3·6·9·12월에는 형조와 사간원 관원이 전옥서에 갇힌 죄수를 심리하여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24일). 또한 왕은 간혹 승지 등을 보내 죄수들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가벼운 죄수의 경우에는 석방하게 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일).

그리고 만약 수감된 죄수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면 즉시 의금부(義禁府)에 보고하여 한성부에서 다시 검시한 뒤에 매장하였다(『세종실록』 20년 12월 24일). 죄수 중 병이 있는 자는 동·서활인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3월 4일).

한편 조선전기에만 존재하였던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土官) 직제에 전옥서를 각각 두기도 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5일). 함경도의 영흥부에 두었던 전옥서는 1407년(태종 7) 사옥서(司獄署)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7년 9월 1일).

변천

전옥서는 1414년(태종 14) 관제 개정 때 영과 승을 승과 부승으로 개칭하였고, 1460년(세조 6)에 승 1명을 삭감하고 체아직으로 조정하였다. 그 후 1466년 1월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된 대대적인 관제 개정 때에 관원 중 승을 폐지하고 그 대신 종6품의 주부(主簿) 1명을 두고 부승은 봉사(奉事)로 개칭하고 1명으로 삭감하고 새로이 종9품 참봉(參奉) 1명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이로써 전옥서는 종7품 아문에서 종6품 아문으로 승격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때의 개정 내용을 반영하여, 소속 관원의 직제가 승지가 겸하는 부제조(副提調) 1명과 종6품의 주부 1명, 종8품의 봉사 1명, 종9품의 참봉 1명으로 규정되었다.

전옥서의 직제는 1703년(숙종 29) 일부 개정이 이루어져 봉사가 혁파되는 대신 참봉 1명이 추가되었다. 전옥서의 관원에 대한 포폄은 매년 봄과 가을에 승지 중 형방승지(刑房承旨)와 형조 참의가 함께 하였다. 전옥서는 1894년(고종 31) 감옥서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한편 전옥서의 청사는 서울의 중부 서린방에 위치하였다. 청사의 규모는 3칸이며, 남자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동쪽에 3칸, 서쪽에 3칸, 북쪽에 3칸이며, 여자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남쪽에 2칸, 서쪽에 3칸 있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추관지(秋官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