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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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도읍지 중의 하나이자 현재 강소성 성도의 명칭.

개설

현재 강소성 남경시이다. 명을 개국한 홍무제는 1368년 금릉(金陵: 남경의 옛 명칭)을 남경으로 하고 변양(汴梁: 개봉(開封)의 옛 명칭)을 북경으로 삼았다. 개봉을 북경으로 삼았다가 1378년 개봉을 북경으로 정한 것을 파하고 남경을 수도로 하였다. 정난의 역으로 조카에게 황위를 찬탈한 주체는 1421년 북경 순천부로 천도하여 북경을 수도로 하였으나 응천부는 계속 수도의 지위가 유지되어 양경 체제가 성립되었다.

남경성의 수축은 1366년부터 시작되어 1386년에 완성하였다. 전체 성의 길이는 33.65㎞이며 평균 높이는 19m에 달하였다. 13개 성문이 있었고 성 안에 규모가 웅장한 궁성이 건설되었다. 다시 1390년 도성 바깥을 둘러싼 황토 언덕을 이용하여 외곽에 토성이 증축되었다. 토성의 주위는 120리(약 47㎞)인데 그 중 벽돌로 쌓은 것이 40리(약 16㎞)로 18개의 성문이 있었다. 청초에 응천부를 강녕부(江寧府)로 칭하고 남경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나 습관상 계속 남경이라고 칭하였다. 신해혁명 당시 한 차례 남경이라는 호칭을 회복하였으나 다음 해에 파하였다. 1927년 국민당 정부는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정식으로 남경이라고 명칭하였다.

조선에서는 명의 수도 남경을 ‘중국 남경’으로 표기하여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원에 귀부하여 이주해 간 개원로(開元路)의 ‘남경’과 구별하였다[『태조실록』 총서 2번째기사](『태조실록』 1년 10월 22일).

명칭 유래

남경의 명칭은 명대에 기원한 것으로 『명사(明史)』에 의하면 1368년(홍무 원년) 응천(應天)을 남경으로 하고 개봉을 북경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명대의 남경은 수도의 명칭이 아니라 당시 개봉부에 대한 상대적 명칭이었다. 남경에 대한 별칭인 금릉은 기원전 333년 전국시대 초나라 위왕(威王) 7년에 월(越)나라를 멸한 후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청량산(淸凉山)에 금릉읍(金陵邑)을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자연 환경

장강(長江)의 하류에 위치하며, 아열대 기후였다. 서쪽으로는 장강에 동남쪽으로 영진산맥(寧鎭山脈)이 둘러싸여 군사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형성 및 변천

오나라 손권이 정식으로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건업(建業)이라 하였다. 282년 건업(建業)을 건업(建鄴)이라고 하였다가 313년 사마예(司馬睿)가 다시 건강(建康)으로 하고 동진의 국도로 삼았다. 동진 왕조는 토성을 벽돌로 쌓고 황궁을 확장하였으나 건업성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황제를 칭하고 응천부에 도읍을 정하고 10여 년 동안 중건과 확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명대의 고궁은 청 함풍 연간에 화재를 입어 현재는 유적 일부만이 남아 있다. 중·영 전쟁 당시 청 정부는 남경에서 영국과 남경조약을 맺었다.

1853년 태평군이 남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태평천국을 건립하였는데 남경을 천경(天京)이라고 개칭하고 11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다. 1911년 17개의 성 대표들이 남경에서 손문(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중화민국을 건립하였을 때 남경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 강소성 인민 정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남경은 강소성의 성도가 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중국 강소성의 성도로서 중국 동부 지구의 장강 하류에 위치한다.

참고문헌

  • 『명사(明史)』
  • 『태평어람(太平禦覽)』
  • 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 吳祚來·陳宏仁 主編, 『中國旅遊文化大辭典』, 江西美術出版社, 1994.
  • 조영헌, 「북경 수도론과 대운하-명조(明朝)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55, 중국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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