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司憲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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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및 조선시대 시정(時政)을 논의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던 업무를 담당하던 관서.

개설

백부(柏府), 백부(佰府), 상대(霜臺), 오대(烏臺), 오부(烏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헌부는 고려 후기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다가 조선시대에 상설화된 관서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한편 한성부(漢城府)·형조(刑曹) 등과 함께 삼법사(三法司)로 불리며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는 감찰기구로 활동하였다. 또한 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과 함께 삼사(三司)로 통칭되면서 탄핵과 간쟁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조정 내 언론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사헌부는 고려 후기인 1298년(고려 충렬왕 24)에 설치된 것으로 이전 신라 때의 사정부(司正部)나 내사정전(內司正典) 등과 고려시대 사헌대(司憲臺)·금오대(金吾臺)·어사대(御史臺)·감찰사(監察司) 등을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설치 이후 사헌부는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다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다시 설치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무백관의 관제를 제정할 때 고려 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되어, 조선조 이래 존속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 후기 1298년 설치 당시 대부·중승·내시사·전중내시사·감찰내사·주부 등의 조직으로 편제되었다가 얼마 후 폐지되었으나, 다시 설치되면서는 대사헌·집의·장령·지평·규정 등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혁파되었고, 1369년 다시 설치되면서 집의를 혁파하고 지사·겸지사로 개편하는 등 일부 변화를 보였다.

이후 조선조 사헌부 성립 당시 종2품 대사헌 1명, 종3품의 중승 1명, 겸중승 1명, 정4품의 시사 2명, 정5품 잡단 2명, 정6품 감찰 20명 등으로 조직되었다. 1401년(태종 1) 품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칭을 개정하여 대사헌 1명, 집의 1명, 장령 2명, 지평 1명, 감찰 등으로 개편되었으며, 감찰은 24명을 두고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하였다. 세조 때 감찰이 19명으로 축소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대체로 태종대 관제 개정에 준해서 규정되었으나, 다만 정5품의 지평만 정원이 2명으로 증액되었고, 감찰도 19명에서 다시 24명으로 증액되었다.

조선시대 사헌부는 사간원이 설치되면서 대간(臺諫)으로 통칭되며 시정의 논평과 백관의 규찰 등을 관장하였다. 사헌부 관원은 조계(朝啓)나 상참(常參) 등에 참여하여 정사를 계문(啓聞)하였고, 윤대(輪對)에도 참여하였으며, 정조(政曹)와 함께 각종 시책이나 입법 등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특히 시종으로 경연과 서연 등에 참여하였으며, 국왕의 행행(行幸)에 호종하였다. 법사로서는 백관에 대한 규찰이나 국문에 참여하였고, 결송을 맡아 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서경(署經)의 임무를 가졌다. 서경은 고신서경(告身署經)과 의첩서경(依牒署經)으로 나뉘는데, 고신서경은 5품 이하 수직자의 고신을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경을 하는 것으로 이때 수직자의 내외 4조와 수직자에게 허물이 있는가 등을 조사하였다. 의첩서경은 새로운 법을 만들 때나 구법(舊法)을 개정할 때, 상중에 있는 관원을 기복(起復)할 때 그 가부를 서경하는 것으로 해당 사항이 있을 때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계문한 의안을 예조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을 상고한 뒤에 의첩을 관계 관서에 내주었다.

이 같은 사헌부 직임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관(臺官)으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필요했다. 따라서 구임원 여부를 논하지 않고 언론이 강개한 자를 널리 뽑아서 천망을 하였고, 다른 중요한 관서와 마찬가지로 내외 4조와 당사자의 허물 여부를 상고하였다. 물론 장리(贓吏)의 자손은 사헌부 관원에 제수될 수 없었다.

대간은 직책상 피죄될 위험성이 많기 때문에 공무상의 과실이 있을 때 좌천은 되지만 지방관으로 전출되지는 않았다. 대간에 대한 신분 보장의 일환이었다. 대간에 대한 특별 대우는 포폄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반 관원이 6월과 12월 두 차례 포폄을 받는 것과는 달리 사헌부를 비롯한 사간원, 세자시강원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았다. 근무 성적 평가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헌부의 관서는 서부 적선방의 중추부(中樞府) 남쪽에 위치하였다. 부속 건물로 다시청(茶時廳)·제좌청(齊坐廳)·성상소(城上所)가 있었다.

변천

사헌부는 성종대 홍문관이 설치되면서 사간원과 함께 삼사로 통칭되며 조정 내 언론활동을 주도하였다. 성종대 이후 대간은 권력구조의 최상층부에 있는 관료들을 거침없이 탄핵하였다. 그들은 풍문탄핵(風聞彈劾)이 허용됨으로써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서도 언제든지 조정의 중신들을 탄핵할 수 있었다. 풍문탄핵을 비롯한 삼사 언론에 대해 조정 중신이나 일부 국왕들의 견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헌부를 비롯한 언관들은 이러한 견제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논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16세기 이후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17세기 사림정치하에서 활성된 논의구조의 특징을 대변하는 것이 원의제(圓議制) 또는 완의제(完議制)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만장일치제로 삼사 전체의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으므로 강력한 파급력을 가졌다. 그런데 논의 내용이 조그만 혐의라도 있으면 이를 피하기 위해 해당 관원은 피혐(避嫌)을 하며, 이런 피혐에 대해 삼사에서 자율적으로 잘잘못을 가려 왕에게 출사나 체직을 요구하는데 이를 처치(處置)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 삼사 관원에 대한 인사권을 이조 판서나 당상관에게 일임하지 않고 이조 전랑(銓郞)에게 이들을 선발할 수 있는 통청권(通淸權)을 위임함으로써 고위 관원에 대한 견제 기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조 전랑과 삼사의 위상은 17세기 후반 이후 환국(換局)이 거듭되고, 이어 탕평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탕평책이 본격화되며 왕권 강화가 추진되던 영조대 이조 전랑의 통청권이 혁파되는 등 청요직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삼사의 언론이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론(黨論)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의 위상은 추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택리지(擇里志)』
  • 박용운, 『고려시대 대간제도 연구』, 일지사, 1980.
  • 정두희, 『조선시대의 대간연구』, 일조각, 1994.
  • 최승희, 『조선초기 언론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4.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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