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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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서적을 관장하고 경연(經筵)을 맡아 왕의 고문(顧問)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홍문관은 1493년(세조 9) 조선 왕실의 장서 기관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1907년(융희 1) 규장각(奎章閣)에 병합될 때까지 400년간 중앙 관서로 존속하였다. 장서 기관으로만 기능하던 홍문관은 성종대에 집현전(集賢殿)의 직제와 기능을 계승하여 그 기능과 권한이 확대·강화되었다. 장서 기관 이외에도 학술·문화·정치 기능들을 겸하여 조선시대의 학술·문화·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삼사(三司)의 하나로서 언관(言官)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56년(세조 2)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단종을 복위하려던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직접적인 계기로 하여 집현전이 폐지되었다. 그 기능 중 경연 등은 폐하였고 도서 관리 업무만 예문관으로 넘겨 운영하였다. 집현전을 혁파한 세조는 예문관을 집현전 대신하는 문한(文翰) 기관으로 육성했다. 그러나 예문관 전원이 겸직이었고, 경연이 신하들과 함께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라 왕인 세조가 강의를 하는 친강(親講)이라는 독단적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로써 애당초 문치주의를 지향했던 문한 관서로서의 모습은 무색해졌다.

홍문관은 세조 9년 11월 당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궁중의 장서를 관장하는 기구로 출발하였다. 이때의 홍문관은 명칭만 홍문관이었지 도서관 기능을 하던 것이었으므로, 이전의 집현전이나 나중의 홍문관과는 성격이 달랐다.

세조가 죽은 뒤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집현전과 같은, 경연을 담당하고 정책을 논의하며 왕 자문 기관으로 기능하는 관서의 설치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1478년(성종 9) 홍문관이 집현전의 역할을 대신할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이때의 홍문관은 이전의 집현전과 마찬가지로 서적을 관장하고 문한을 담당하며 왕의 고문(顧問)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삼사로 불리며 조선시대 문치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홍문관이 처음 설치되었던 세조 9년, 홍문관의 직제는 대제학(大提學) 1명, 제학(提學) 1명, 직제학(直提學) 1명, 직관(直館) 1명, 박사(博士) 1명, 저작(著作) 1명, 정자(正字) 1명이었으며 모두 겸직이었다. 대제학·제학·직제학 등은 판서·승지 등의 중신들이 겸임하였고 실무관인 박사 이하는 모두 예문관의 관직자들이 겸임하였다. 당시의 홍문관은 명목상 독립된 기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예문관에 의해 운영되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홍문관 직제는, 의정을 겸직한 정1품 영사(領事) 1명, 정2품 대제학 1명, 종2품 제학 1명, 정3품 당상 부제학 1명, 정3품 당하 직제학 1명, 종3품 전한(典翰) 1명, 정4품 응교 1명, 종4품 부응교(副應敎) 1명, 정5품 교리(敎理) 2명, 종5품 부교리(副校理) 2명, 정6품 수찬(修撰) 2명, 종6품 부수찬(副修撰) 2명, 정7품 박사 1명, 정8품 저작 1명, 정9품 정자 2명을 두었다. 홍문관의 직제는 영사부터 제학까지는 모두 겸직이었다. 실질적인 책임자는 정3품의 부제학이어서 부제학을 장관(長官)이라고 불렀고, 관제상으로는 홍문관이 정3품 아문이 되었다.

이들 중 제학에서 정자까지의 관직을 18학사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주로 저술, 지제교, 경연 등의 임무가 맡겨졌다. 왕의 교서를 제술하는 지제교(知製敎)의 임무는 부제학 이하 부수찬 이상의 관원이 겸임하였고, 경연의 제4품 시강관(侍講官)은 직제학부터 부응교가, 정5품 시독관(侍讀官)은 교리와 부교리가, 정6품 검토관(檢討官)은 수찬·부수찬 등이 각각 겸임하였다. 동시에 이들 녹관(祿官)은 품계에 따라 전원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홍문관에는 18학사 이외에도 검교(檢校)와 특진관(特進官)이라는 비상임직이 있었다. 검교는 홍문관의 부제학이나 전한을 역임한 전직 관원 중에서 임명되었다. 홍문관의 상급 관원에 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정해진 인원수는 없었다. 특진관은 경연 때 특별히 진강(進講)을 맡는 관원으로, 문관·음관과 무관 2품 이상인 관원 가운데 홍문관의 부제학이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벼슬하지 않고 산속에 숨어 지내는 산림(山林)을 중심으로 특진관 제도가 활성화되었다.

그 밖에 홍문관의 업무인 장서의 정리와 출납 등은 홍문관에 속한 이속(吏屬)들에게 맡겨졌다. 이 외에 홍문관의 중요한 직무로서는 검서관(檢書官)이 있다. 이들은 규장각의 전직 검서관 중에서 2명을 뽑아 왕의 허락을 얻어 임용하였다. 검서관은 축시(祝詩)·제문(祭文)·절일첩(節日帖) 등을 왕에게 올리는 데 부수되는 사무와 교서의 정서 등을 관장하였다. 그 밖에 홍문관에는 사자관(寫字官), 서방색(書房色) 사약(司鑰) 등이 있었다.

홍문관 관원을 뽑을 때는 다른 관원과는 달리 뽑기 이전에 그 후보자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록(弘文錄)을 미리 작성해 두었다. 홍문관원 중에 결원이 발생하면 홍문록 안에서만 천거하여 선발할 수 있었다. 홍문록의 작성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홍문관에서 권점(圈點) 방식으로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한다. 둘째, 이조(吏曹)에서 본관록을 바탕으로 같은 방식으로 추천하여 이조록(吏曹錄)을 작성한다. 셋째, 이조록이 의정부에 보고되면 의정부에서 최후로 첨삭한 도당록(都堂錄)으로 확정된다. 이는 홍문관원의 임무를 다른 관원과 달리 중시한 것으로, 홍문관 관원을 뽑는 과정에서 이조의 영향력을 되도록 배제하고 공정한 인재 선발 원칙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원봉성(元鳳省)을 설치하여 왕 대신 글을 짓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제찬(制撰)과 사명(詞命)을 관장하게 하였다. 원봉성은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대에 한림원(翰林院)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충선왕 복위년에는 문한관과 사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태조 원년 예문관을 두었고, 1401년(태종 1)에 이르러 관제가 개편되어 예문관이 강화되었다. 세종대에는 집현전의 설립으로 예문관의 기능이 상당 부분 집현전에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그동안 유야무야하던 예문관에서 장서들을 보관하게 되었다. 세조 8년에는 예문관에 겸예문관직이 설치되어 집현전의 일부 업무를 대신하였다.

1463년(세조 9)에는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하는 관서로 홍문관이 설립되었다. 1470년(성종 1)에는 당초의 예문관의 직제에다 집현전의 이전 직제를 함께 설치하여 세종대의 집현전 기능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1470년(성종 9)에 이르러 홍문관이 집현전을 대신하는 명실상부한 문한 기구의 대표 관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초기 경연과 고문 전담 관서의 변천 과정은 예문관→집현전→예문관→홍문관으로 이어갔다.

연산군은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을 폐지하고 진독청(進讀廳)을 두어 경연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에 대한 문신들의 간섭을 배제하였다. 홍문관은 중종 초에 복구되어 영사(領事) 이하 홍문관원들이 경연과 춘추직을 겸직하였다.

1777년(정조 1) 규장각이 건립됨에 따라 홍문관 장서의 일부가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1894년(고종 31)에는 홍문관이 경연청과 통합되어 경연원(經筵院)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다시 홍문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궁내부(宮內府)에 소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1) 규장각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홍문관지(弘文館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오항녕, 「조선초기 문한관서의 정비와 사관제도」, 『한국사학보』7, 1999.
  • 최승희, 「집현전 연구 상: 치폐시말과 기능 분석」, 『역사학보』32, 1966.
  • 최승희, 「집현전 연구 하: 치폐시말과 기능 분석」, 『역사학보』33, 1967.
  • 최승희, 「홍문관의 성립 경위」, 『한국사연구』5, 1970.
  • 최승희, 「홍문록고」, 『대구사학』15·16,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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