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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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관료를 대표했던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관원.

개설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홍문관과 예문관에 둔 정2품 관직으로 정원은 각 1명이다. 학문의 저울, 문장의 기준이며 학자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에서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도 대제학이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유가(儒家)의 왕도 정치를 지향했던 조선 사회에 들어와 대제학은 그 의미가 크게 높아졌다. 대제학은 성학(聖學)으로 대변되는 학문과 인격의 사표(師表)로 상징되는 존재였으며, 문무 양반을 통틀어 가장 영예로운 관직이었다. 조선후기 산림(山林)의 등장으로 대제학의 실제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나, 관직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일본의 강점으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대제학은 존속되었다.

담당 직무

대제학이란 호칭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대제학을 문형이라고 부르는 관례는 조선시대에 시작되었다. 문형이란, 문장의 권형(權衡)을 장악하고 학자 가운데 으뜸이 되는 존재로, 글을 짓는 법도의 방향이 문형에게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조선후기의 학자인 서명응(徐命膺)이 조선시대에 문화가 번성한 것은 문형 때문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대제학의 별칭인 문형은 원래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주고관(主考官), 즉 지공거(知貢擧)를 의미했다. 그리고 한림원(翰林院)의 후신은 예문관이었고, 조선 건국 초기에 문한(文翰) 관서는 예문관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왔다. 때문에 대제학 역시 예문관 소속 관원이었으며, 으레 대제학은 예문관 대제학을 본직으로 하고 집현전 대제학을 겸직으로 하였다.

하지만 겸직이라도 홍문관 대제학은 의무 겸직이라는 점에서 여느 겸직과 달랐다. 즉, 문형은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역할과 더불어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경연관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문관 대제학은 겸직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조선초기 이래 문한 관서의 변천 과정 때문에 예문관 대제학을 본직으로 한 것일 뿐 실제로는 홍문관 대제학이 본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양상은 사관인 한림들이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면서 예문관에 녹관(祿官)으로 재직했던 것과 역사적 맥락이 같다.

대제학은 겸직이었기 때문에 의정(議政)으로 교체되거나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토록 겸임할 수 있었다. 또한 문형은 후임 문형을 자대(自代)하는 관행이 이어졌다. 이는 대제학이라는 지위와 위상에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대제학을 가리키는 문형은 원래 과거 시험에서 문장을 저울질한다는 의미, 즉 시험 답안을 채점한다는 의미였다. 앞서 말한 지공거가 바로 이 뜻이었다. 과거 시험의 문과 시험 과목인 경학(經學)·사장(詞章) 모두 문장이 기준이었고, 점차 경학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과거를 책임지는 대제학 역시 조선중기 이후로는 출처(出處)와 덕망이 중요한 선임 기준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학자들 중에서 관료를 선발하는 것은 왕을 대신하는 신하의 책무였고, 인재 발굴·교육·문한이 대제학의 역할이 되었다. 특히 문관(文官)을 대상으로 치르는 중시(重試)는 이미 관원이 된 이들에 대한 재교육의 성격을 띤 제도였다. 시험관(試驗官)은 독권관(讀卷官) 의정 1명과 종3품 2명이었지만, 시험 출제는 대제학이 주관하였다.

조선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대제학의 직무는 사대(事大) 외교 문서의 작성이었다. 특히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대문서는 더욱 중요했다.

한편 집현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편찬 사업의 중심 역시 대제학이었다. 세종대의 집현전 편찬 사업에는 세종의 지지와 관심이 큰 몫을 하였지만, 집현전의 운영과 기획은 실제 관장(官長)이었던 대제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제학은 성종대의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 주요 편찬 사업에서도 책임관이었다.

변천

대제학은 1401년에 대학사(大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전기에는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에는 집현전에도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 2)에는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치고 홍문관에 대제학을 두었다. 후기에는 홍문관 대제학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대제학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였다.

대제학이란 관직명은 고려후기에 처음 등장했다. 고려시대에 문한을 총괄하는 지위는 예문춘추관의 대학사와 한림원의 최고 관원인 대학사였는데, 1362년(고려 공민왕 11) 대학사를 대제학으로 고쳤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는 보문관(寶文館)과 진현관(進賢館)에도 대제학을 두었다. 이후 대제학이 대학사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대학사가 대제학으로 바뀌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대학사였는데, 1401년(태종 1) 예문춘추관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면서 예문관의 최고 책임자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면서 집현전 최고 관직으로 대제학을 두었고 예문관 대제학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후에는 집현전이 홍문관으로 바뀌면서 예문관 대제학은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직제는 그대로 성종 때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며 고종 때의 『대전회통』까지 이어졌다.

1776년(정조 즉위)에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되었지만, 제학(提學) 이하 관원만 설치했을 뿐 대제학은 따로 두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말까지 대제학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간행위원회 편,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상·하, 혜안, 2000.
  • 박천규, 「문형고」, 『사학지』 6, 1972.
  • 오항녕, 「조선초기 문한관서의 정비와 사관제도」, 『한국사학보』 7, 1999.
  • 유영옥, 「집현전의 운영과 사상적 경향: 성리학 이해를 중심으로」, 『부대사학』 18, 1994.
  • 정두희, 「집현전 학사 연구」, 『전북사학』 4, 1980.
  • 정옥자, 「18세기 문형들의 문학사상: 영조대 문형」, 『진단학보』 68, 1989.
  • 최승희, 「조선초기 언관에 관한 연구: 집현전의 언관화」, 『한국사론』 1, 1973.
  • 최인기, 「조선초기 문원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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