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찬(副修撰)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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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수찬 |
한글표제 | 부수찬 |
한자표제 | 副修撰 |
상위어 | 녹관(祿官), 당하관(堂下官), 동반(東班), 수찬(修撰), 실직(實職), 정직(正職), 참상관(參上官) |
하위어 | 박사(博士) |
관련어 | 검토관(檢討官), 겸직(兼職), 경연(經筵), 경연청(經筵廳), 기주관(記注官), 사관(史官), 실록청(實錄廳),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 집현전(集賢殿), 춘추관(春秋館)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대한제국 |
집필자 | 오항녕 |
관품 | 종육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수찬(副修撰) |
홍문관(弘文館)에 소속되어 있던 종6품 관원.
개설
부수찬(副修撰)은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을 다시 설치하면서 녹관(祿官) 문신 종6품 관원을 부수찬에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수찬은 경연을 담당하며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한 뒤 부수찬도 사라졌으나, 인재 양성을 이유로 다시 경연과 문한(文翰) 관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면서 예문관 관원을 부수찬으로 했다가, 1478년(성종 9) 홍문관 관원이 부수찬으로 편제되었다.
담당 직무
홍문관 부수찬은 문한을 담당하며, 왕의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직무를 띤다. 부수찬은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역할과 더불어 고문에 대비하는 경연관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즉, 부수찬의 역할은 자문, 교육, 문한이었다. 또한 부수찬은 수찬(修撰)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수찬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경연관이었다. 부수찬은 경연에서 검토관(檢討官)을 맡았다. 검토관은 1401년(태종 1)의 관제에서 경연 정5품 관직이었다가 예종 때 일시적으로 없어지고, 성종대에 정6품직으로 다시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홍문관이 국가의 모든 편찬 사업을 주관하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관원인 부수찬도 성종대의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런 역할은 조선후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부터 부수찬에 이르는 관원에게 지제교를 겸임하게 했으므로, 부수찬도 지제교의 직무를 띠었다.
부수찬은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 편찬에서도 중요한 관직이었다. 부수찬은 다른 홍문관 관원과 함께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하면서 직접 기록을 작성하는 사관(史官)의 직무를 수행했다.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어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게 되면 실록청 편찬관으로도 참여했다.
변천
부수찬은 폐지되었던 집현전을 1420년에 다시 설치하면서 녹관 문신 정5품 관원으로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을 폐지하면서 부수찬도 없어졌다가, 1470년(성종 1) 인재 양성을 이유로 경연과 문한 관서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다시 생겼다. 이때 예문관 부수찬 3명을 종6품 관직에 두게 하고 모두 지제교를 겸하게 하였다. 1478년에는 홍문관 종6품 관원으로 편제되었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 강독(講讀)과 고명(誥命)을 맡는 경연청(經筵廳)을 두었는데, 이때 시독(侍讀)으로 바뀐 듯하다. 1907년(순종 즉위) 홍문관을 폐지하면서 부수찬도 함께 없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간행위원회 편,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상·하, 혜안, 2000.
- 오항녕, 「조선초기 문한관서의 정비와 사관제도」, 『한국사학보』 7, 1999.
- 유영옥, 「집현전의 운영과 사상적 경향: 성리학 이해를 중심으로」, 『부대사학』 18, 1994.
- 정두희, 「집현전 학사 연구」, 『전북사학』 4, 1980.
- 최승희, 「조선초기 언관에 관한 연구: 집현전의 언관화」, 『한국사론』 1, 1973.
- 최인기, 「조선초기 문원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