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과(實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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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의 모든 열매.

개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초목(草木)의 모든 열매를 통틀어 일컫는다. 과일 또는 과실(果實)이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조에 오과(五果)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문(素門)』의 주(註)에는 오과를 복숭아, 오얏, 살구, 밤, 대추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나해왕(奈解王)조에 복숭아와 오얏이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조에는 무덤 옆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고 하니 잣이 식용되었을 것이다. 「위지」 동이전 마한(馬韓)조에 금수초목(禽獸草木)이 중국과 거의 같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중국 화북(華北) 지방의 과실이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식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원 및 용도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수로왕묘 제수(祭需)로 과(菓)가 나온다. 제수로 쓰는 과는 본디 자연의 과실이었다. 과실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실의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과수의 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을 것이다. 옛날에는 나무 열매를 과(菓), 풀의 열매를 라(蓏)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통틀어 과(果)라고 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과실의 종류와 기원은 다음과 같다.

핵과(核果)류 중 복숭아[桃]는 황하 상류의 섬서성(陜西省)의 고원지대가 원산지로서 『시경(詩經)』과 『산해경(山海經)』에 기록이 있으며,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신라의 복숭아, 『신당서(新唐書)』에 산도(山桃)가 나온다. 경주시 황남동 고분에서 복숭아씨가 출토되었다. 매실(梅實)은 사천성(四川省)의 산악지대에서 야생하였고, 중국 중부와 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시경』과 『이아(爾雅)』에 기록이 있다. 살구[杏]는 중국 북부의 과실로 『예기(禮記)』와 『산해경』에 나온다. 47년 유럽에 전해졌다고 한다. 오얏[李]은 사천성과 운남성(雲南省)에서 야생하였고, 『시경』·『산해경』·『이아』에 나온다. 앵두[櫻]는 화북 지방에서 야생하였고, 『시경』에 욱(薁), 즉 산앵두나무로 나온다.

인과(仁果)류 중 배[梨]는 중국·일본·유럽에서 각각의 야생종이 있다. 중국 배는 『산해경』·『예기』·『이아』에 나오고, 『사기(史記)』에는 주먹만 한 배가 있어 벌꿀처럼 달다고 하였다. 능금[林檎]은 만주 지방인 듯하다. 능금 무리는 식물 분류학상 능금속에 속하는 것으로 그 원생종의 분포는 유럽·아시아·북미 3대륙에 걸쳐 있다. 이성우(李盛雨)는 중국 문헌에서는 능금이 발해에서 난다고 하였고, 만주·한국 등지에 야생하고 있으므로 동북아시아, 즉 옛 고구려 땅이 원산지라고 하였다. 모과[楙]는 중국이 원산지인 듯하고, 『산해경』·『이아』에 나온다. 『고려노사방(高麗老師方)』에 모과[木瓜]가 있어 고구려에서 모과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인과(準仁果)류로 감[枾]은 중국이 원산지로, 『예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장과(漿果)류로 포도(葡萄)는 아시아 서부의 흑해연안과 캅카스 지방이 원산지로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가져왔다.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그 재배법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재배되었고, 『목은집(牧隱集)』의 「신우숭덕사(新寓崇德社)」라는 시에 “포도송이 시렁에 가득, 푸른빛 흐르는 것 같네[葡萄滿架翠如流]”라 하였다. 석류(石榴)는 페르시아가 원산지로, 이것도 장건이 가져왔다고 한다. 오디[桑椹]는 중국이 원산지로 갑골문자에 나오고, 『시경』에도 나온다.

장과(漿果)류로 귤(橘), 유자[柚]는 『산해경』,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온다. 감귤류의 원산지는 인도 동부의 히말라야, 아셈, 중국의 양자강 유역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라에서 온 자손이 상세국(常世國: 현 제주도)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탐라국에서 백제 문주왕에게 감국을 바쳤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는 대마도의 사자(使者)가 감귤을 가져왔고, 예종 때에는 일본에서 감자(柑子)를 가져왔다고 한다.

건과(乾果)류로 밤[栗]은 유럽·중국·북미 각지에 각각의 야생종이 있고, 이들이 제각기 개량되었다. 『시경』, 『산해경』, 『예기』 등에 나온다. 밤나무는 삼국시대에 널리 분포되었고 매우 우수한 품종이 있었다고 한다. 호두[胡桃]는 만주호두가 동북아시아에 있었고, 장건은 서아시아에서 서양호두를 들여왔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고려 방언으로 호두를 가래[渴來: 야생 호두]라 했다. 『목은집』의 「백척추(百尺楸)」라는 시에서 추(楸)는 가래를 말한다. 개암[榛子]은 동부 시베리아·한국·만주·화북 등지에 야생종이 있고, 『시경』·『예기』에 나온다. 『대명일화본초(大明日華本草)』에 신라의 개암은 살찌고 능히 굶주림을 그치게 한다고 하였다. 가시연밥[芡榛]은 인도·중국이 원산지로 『주례(周禮)』, 『이아』에 나온다. 잣[海松子]은 심산유곡에 자라는 잣나무[五葉松, 海松]의 열매로 도가(道家)에서는 도를 닦을 때 먹었고, 향기로운 맛이 있으며 약효가 있다. 중국 문헌에서 신라의 잣을 특히 칭찬하였고, 명산물로 진헌품으로 많이 쓰였다. 일본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에는 신라의 잣을 구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패사(稗史)』에 신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송자를 많이 가져왔는데, 이를 옥각향(玉角香) 또는 용아자(龍牙子)라고 하였고, 공향(公鄕)들의 집에 선사한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잣이 생산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회 때에 사용하는 실과의 종류는 40여 가지였다. 궁중에서 상례나 제례 때 실과를 진설할 때 위치와 분량이 정해져 있었다(『세종실록』 1년 8월 19일). 왕족이나 신하가 죽었을 때는 부의로 과일을 내렸다. 모시 외에 종이 100권, 꿀 1석, 참기름 1석, 밀가루 3석과 각종 실과 각 10두를 하사하였다(『성종실록』 18년 1월 27일).

제물에 쓰이는 과일은 장원서(掌苑署)에 바치는데 1519년(중중 14)에는 비자(榧子)의 수량이 너무 많아, 수량을 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중종실록』 14년 9월 25일). 광해군대에는 장원서의 과실은 공물로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하리들이 산지와 밀통하여 사들여 놓았다가 납공에 응하는 바람에 배 1개의 값이 면포 1필, 은행 1말의 값이 정미(正米) 80말이 된 적도 있었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25일).

생활민속 관련사항

민가에서 제상을 진설할 때 실과와 조과(造果)는 참례자 쪽에 보아 첫째 줄에 놓는데 이를 과실줄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이성우, 『고려이전 한국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78.
  • 이성우, 『동아시아 속의 고대 한국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92.
  • 황혜성 외, 「궁중의 식생활」, 『한국음식대관』6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