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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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후궁으로 내명부의 정일품(正一品) 위호(位號).

개설

조선시대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정1품 내명부의 관작명이다. 1428년(세종 10) 귀인(貴人)과 함께 정1품에 속하였으나, 『경국대전』「이전(吏典)」 ‘내명부’조에서는 귀인이 종1품으로 되어 빈(嬪)만이 정1품으로서 최고의 위치가 되었다. 이후 이 조항은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몇 차례의 법이 개정되었음에도 조선왕조 말기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대전회통』에서 “교명이 있으면 계(階)가 없다.” 즉, 왕의 명령이 따로 있으면 별도의 품계가 없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담당 직무

내명부 소속 여성들은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1428년에 후궁의 고유한 직무가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빈의 주요 임무는 귀인과 함께 왕비의 보좌를 맡고 부녀자들이 지녀야 할 예절 내지 행동 규범을 논(論)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 10년 3월 8일).

보통 후궁은 왕비를 보좌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왕의 자녀를 생산하는 데에 그 역할이 있었다(『선조실록』 13년 4월 28일). 빈이 낳은 아들은 군(君), 딸은 옹주(翁主)로 칭하였다. 조선후기로 올수록 후궁 소생들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왕실 안에서 이들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초기에는 빈을 포함한 후궁들 중에 왕비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본처와 첩을 구분하는 적첩(嫡妾)의 명분이 엄격해지면서 조선중기 이후에는 후궁 중에 왕비가 나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단,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 장희빈(張禧嬪)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이외에 왕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왕실 어른 봉양(『세종실록』 21년 1월 27일) 그리고 왕비 유사시에 내명부의 모든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일 등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세종실록』 4년 4월 4일). 특히 빈은 후궁 가운데에 최고의 위치로서 왕비 다음이었다.

변천

빈은 내명부 내관(內官)에게 주던 정1품직으로, 1428년 3월에 개정된 내관 제도에서는 귀인과 함께 정1품직이었다. 이때 빈과 귀인의 인원은 명시되지 않았다. 빈과 귀인 아래로는 정2품직인 소의와 숙의, 정3품직인 소용과 숙용, 정4품직인 소원과 숙원 등 각 1명씩 모두 6명을 두도록 했다(『세종실록』 10년 3월 8일). 그러나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 「이전」 ‘내명부’조에서 빈은 종1품 귀인과 구분되어 정1품으로 규정되었다. 빈과 귀인 이하도 각각 정(正)과 종(從)으로 품계가 구분되었으며, 정원은 없다. 이 규정은 이후 편찬된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법전에 변함없이 그대로 수록되었다. 단지 고종대에 편찬된 『대전회통』에서 “교명이 있으면 계가 없다.” 즉, 왕의 명령이 따로 있으면 별도의 품계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왕비와 함께 품계를 초월한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후궁이 처음부터 빈이 되는 경우가 없고 점차로 승격되어 빈이 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간택된 후궁의 경우, 입궁 즉시 숙의가 아닌 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예로는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 화빈윤씨(和嬪尹氏), 수빈박씨(綏嬪朴氏)와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가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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