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민식(役民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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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요역을 부과하는 기준과 체계.

개설

요역(徭役)은 수취제도의 한 형태였다. 전근대시기에 국가는 필요에 따라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할 수 있었다. 지배기구와 지배층이 사용할 각종 물자의 생산과 수송, 토목 공사 등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무상의 강제 노동이 동원되어야 했다.

태조대에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삼는 계정제(計丁制) 방식을 채택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정종과 태종 연간에는 사람과 토지를 모두 기준으로 하는 계전계정(計田計丁)의 절충적 방식을 채택하였다(『태종실록』 6년 11월 17일). 세종대부터는 계전제(計田制)를 채택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그에 따라 토지 소유량에 따라 민가를 대·중·소·잔(殘)·잔잔(殘殘)의 5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기준으로 요역을 부과하였다. 성종대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규정에 의해서 제도화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71년(성종 2)에 제정된 역민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모든 수세전(收稅田) 8결마다 역부(役夫) 1명을 징발하여 사역할 수 있었다. 관찰사는 공역(公役)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돌아가며 역을 부과하였다. 일의 규모가 커서 별도로 징발[調發]할 필요가 있을 때는 6결마다 역부 1명을 추가로 차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민식은 일부가 수정·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내용

요역은 다양한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적용되는 내용에 따라서는 크게 전세미의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 토목 공사, 지대(支待)·영접(迎接) 등으로 구분하였다.

전세미는 조운제도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에서 경창(京倉)으로 운반되었다. 조운제와는 별개로 조창까지의 전세미 수송, 조창에서 조운선으로 짐을 싣는 일 등의 노역은 지방관부의 요역제 운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세미를 수송하는 요역은 정기적인 요역에 속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세 납부의 시기는 그해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였다. 이때 각 군현에서 조창까지 전세미를 운반하는 노역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된 각 군현의 수령이 지휘·감독하였다.

공물·진상물·잡물을 조달하는 요역은 왕실을 비롯하여 중앙 각사와 지방관부에서 사용할 물자를 채집·생산·수송하는 것이었다.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의 구조 하에서 지배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자의 대부분은 백성의 세역(稅役) 부담에 의해 조달되었다. 공물·진상물의 경우도 대부분은 민가의 부담으로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공물·진상물을 조달하기 위한 요역은 잡다한 요역 종목 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민가에 큰 부담이 되었다.

토목 공사 역시 여러 요역 종목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성을 쌓거나 궁궐·관아를 수리하고, 물을 대기 위하여 댐이나 천방(川防)을 수축하며 산릉을 조성하고, 예장(禮葬)을 치르며 묘를 조성하는[造墓] 등의 역사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지대·영접의 요역은 왕·사신·관료의 왕래와 관련된 역민(役民)의 종목이었다. 예컨대 왕의 행차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필요하였다. 강무(講武), 능소(陵所) 거둥, 온천 왕래 등 왕의 외방 행차가 있을 때에는 왕이 거둥하는 길목의 각 군현에서 토목 공사를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일할 수 있는 장정[人丁] 수나 백성이 소유한 토지[所耕田]의 크기에 따라 역민을 부과하였다. 이 2가지 기준은 개별 민가가 보유한 가족·노비의 노동력과 사적인 소유지의 크기를 반영하였으므로, 요역 부담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었다. 세종대 이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요역이 부과되었고, 성종대의 역민식은 그것이 반영된 결과였다.

역민식은 곧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역민식의 운영은 1읍의 소경전 수를 헤아려 ‘역민부(役民簿)’를 작성하고, 전지 8결을 소유한 자는 역부 1명을 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8결 단위로 묶어 역부 1명을 내도록 하였다. 8결 작부는 백성의 소경전 결부에 따라 부과되었으므로 전결을 소유한 자라면 당연히 이를 납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규정이었고, 그 운영의 실제는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 결과 1결을 가진 소농민이 7결을 가진 세력 있는 양반의 토지분 요역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변천

요역의 종목에는 전세미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과 같이 비교적 정기적이고 정량적인 성격의 상시(常時) 잡역과 토목 공사, 지대·영접과 같이 부정기적이고 부정량적인 부류가 있었다. 조선후기 대동법은 이러한 요역의 여러 종목 가운데 일부를 전세화(田稅化)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세미 수송을 제외한 상시 잡역으로서 주로 공물·진상과 관련된 요역 종목이 여기에 흡수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역의 나머지 부분은 대체로 조선후기 각 지방별로 부과되던 잡역세의 징수로 점차 바뀌어갔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잡역세는 이전 시기에 지방적 특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되던 요역 종목의 상당 부분이 물납화(物納化)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강제훈,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요역의 종목구분과 역민규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1995.
  •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 有井智德, 「朝鮮初期の徭役」, 『朝鮮學報』 30·31, 1962.
  •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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