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청(御營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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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번상군을 중심으로 도성 숙위를 담당하였던 중앙 군영(軍營).

개설

반정 공신의 핵심이었던 이귀(李貴)는 개성유수겸어융사(開城留守兼御戎使)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정예병 260여 명을 모집하고자 했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해산시키지 않고 이귀가 1624년(인조 2)에 어영사(御營使)에 제수된 것을 계기로 왕권 호위에 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영청 설치의 시초가 되었다. 곧이어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계기로 병력이 증강되었다. 그럼에도 일시적으로 총융청(摠戎廳)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1627년(인조 5)경부터 어영청으로 독립되었고, 그 무렵에 이서(李曙)를 제조(提調)로, 구인후(具仁垕)를 대장(大將)으로 임명함에 따라 한층 위상이 높아졌다. 1652년(효종 3) 효종의 북벌 계획 추진에 따라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에 제수하면서 확대 개편하여 안으로는 왕권 수호의 정예군으로, 밖으로는 북벌의 선봉군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에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고종대 신식 군대의 도입 등에 따른 군제개혁으로 몇 차례 혁파 및 복구가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에 성공한 인조 정권은 우선 국내의 반대파들을 제압하는 것과 함께 후금(後金)의 거세지는 압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서둘렀다. 특히 전과 달리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면서 친정(親征)까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해 반정공신의 핵심 이귀를 개성유수겸어융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곧바로 정예병 260여 명을 모집해서 국왕이 도착하면 즉각 호위에 동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처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군사는 해산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1624년 이귀를 어영사로 제수하고 이들을 거느리며 왕권을 수호하도록 했으니 이것이 어영청의 시초가 되었다.

곧이어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병력이 증강되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총융청에 소속시켰다. 드디어 1627년(인조 5)경부터 어영청으로 독립되었고, 그 무렵에 이서를 제조로, 구인후를 대장으로 임명함에 따라 위상이 높아졌다. 1652년 북벌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이완을 어영대장에 제수하는 것을 계기로 확대 개편하였다. 안으로는 왕권 수호의 정예군으로, 밖으로는 북벌의 선봉군으로 삼고자 했다. 이때에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설립 초기의 조직 체계는 의정(議政)이 겸임하는 도제조(都提調) 1명, 병조 판서가 예겸(例兼)하는 제조(提調) 1명, 종2품 대장(大將) 1명으로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아래 군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문무낭청(文武郎廳) 각 1명씩을 두었다. 군액은 21,000명으로 6번으로 나누어 번상 근무하게 하였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보인들로 구성되었다. 급료병으로 장기 근무하도록 되어 있던 훈련도감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나친 군액의 확장과 그에 따른 보인의 증가 등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악화 등의 이유로 병력을 감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일부 축소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조직도 개편되었다. 상층 지휘부로는 의정이 겸임하는 도제조, 병조 판서가 예겸하는 제조, 대장까지는 변함이 없었다. 종2품 중군(中軍) 1명, 종3품 별장(別將) 1명, 정5품 천총(千摠) 5명, 영종첨사 겸임의 정3품 별후부천총(別後部千摠) 1명, 정3품 기사장(騎士將) 3명, 종4품 파총(把摠) 5명, 군위 등 수령 겸임의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0명, 종9품 초관(哨官) 41명이 있었다.

그 밖에 종6품 종사관(從事官) 문·무관 각 1명을 두어서 군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교련관(敎鍊官) 12명, 기패관(旗牌官) 11명을 두어 군사훈련을 담당하도록 했다. 별무사(別武士) 30명, 군관(軍官) 38명, 별군관(別軍官) 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가전별초(駕前別抄) 52명, 기사(騎士) 150명 등의 장교급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병력으로는 각 도에서 번상하는 향군(鄕軍), 별파군(別破軍), 경표하군(京標下軍), 수문군(守門軍), 그 밖에 여러 종류의 군사들로 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번상 근무할 때 보인들로 나오는 수입 등으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군액이 몇 차례 변동되었다.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본영(本營) 이외에 신영(新營)·동영(東營)·북이영(北二營)·집춘영(集春營) 등의 영사(營司)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양향(糧餉)을 저장하는 남창(南倉)도 두었다.

변천

재정 부담 등의 이유로 기구를 축소하는 가운데 1706년(숙종 32)에 1영5부제(一營五部制)로 개편하였다. 5부(部) 25사(司) 125초 16,300명으로 정비되었으며, 1초는 3기(旗), 1기는 3대(隊), 1대는 정군(正軍) 10명, 화병(火兵) 1명, 복마군(卜馬軍) 1명으로 편성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고종의 친정 체계의 강화에 따른 군사제도의 개편 과정에서 일어났다. 특히 이때 신식 군대의 도입 등이 추진되면서 1881년(고종 18) 새로 설치한 장어영에 병합시켰다. 이듬해 장어영을 폐지하고 어영청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1884년에는 별영(別營), 1888년에는 총어영(摠禦營)으로 각각 개칭하였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의의

조선후기의 중앙 군영 가운데 전기부터 내려왔던 번상제를 기반으로 하여 도성 숙위를 담당함으로써 구래의 운영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였다. 이로써 조선후기 번상제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車文燮,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96.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 吳宗祿,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 윤훈표, 「조선후기 동궐의 宿衛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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