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록사(僧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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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불교 및 승려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개설

고려시대부터 조선 세종대까지 불교의 제반 사무를 맡아보았다. 『고려사』 938년(고려 태조 21) 기사에 승록사와 관련된 명칭인 ‘양가(兩街)’가 등장하므로, 고려시대 초기부터 승록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고려 광종대에 승과(僧科)를 실시하고 승계(僧階)를 정비하는 등 승정 체계를 갖추면서 승록사도 본격적인 중앙 관청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까지 승록사는 승정 및 불교 행사와 관련한 일을 담당하는 실무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세종대에 폐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불교가 전래된 뒤 불교 교단이 성립되면서 국가에서는 교단을 통제하고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그에 따라 승려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관원을 승려 중에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점차 국가의 공식 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교와 관련한 제반 행정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승정 기구를 설치하였는데, 그 대표 격이 바로 승록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불교 교단 및 승려와 관련된 각종 업무를 승록사에서 담당하도록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그 위상과 역할이 줄어들었지만, 세종대에 폐지될 때까지 계속해서 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맡아보았다.

내용

고려시대에는 승계를 주거나 승직(僧職)에 임명할 때, 일반 관원과 마찬가지로 대간(臺諫)서경(署經)을 거쳐 왕명으로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발급해 주었다. 승록사는 승계 및 승직을 내려 주는 데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불교 및 승려와 관련된 업무, 즉 불교 의식, 불교 행사, 사찰의 제반 사항, 불교와 관련된 행정 문서의 전달, 왕사·국사의 상사(喪事), 고승의 추증(追贈)과 부도(浮屠) 및 비석의 건립 등에 관한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승려들의 호적(戶籍)에 해당하는 승적(僧籍)을 3년에 한 번씩 조사해 경신하고 관리하는 것도 승록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또 고려말기에 도첩제(度牒制)가 시행된 뒤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일도 맡아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승록사에서는 일반 관원과 승계를 가진 승관(僧官)이 함께 근무하였는데, 승관은 승과 합격자 중에서 임명하였다. 승록사의 승관으로는 고려시대 초기에는 승총(僧摠), 승유(僧維) 등이 있었고, 11세기 무렵부터는 도승통(都僧統)을 최고 책임자로 하여 그 아래에 좌·우가(左·右街) 도승록(都僧錄)-승록(僧錄)-부승록(副僧錄)-승정(僧正)-승사(僧史)-기사(記事)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양가도총섭(兩街都摠攝),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등의 승직이 제수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승록사는 승정 및 불교 행사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실무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주로 사찰 관리, 불교 행사 주관(『태조실록』 2년 3월 12일), 도첩 발급(『태종실록』 2년 6월 18일) 등 고려시대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기 전까지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기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사찰의 주지를 임명할 때 승록사에서 각 종문(宗門)의 중망(衆望) 즉 공의(公議)에 따라 대상자를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다시 왕에게 아뢰는 절차를 거쳤다(『태종실록』 2년 6월 18일). 이는 고려시대에 승계를 주거나 승직에 임명하는 절차와 유사하다.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승록사는 고려시대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대와 태종대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양가’,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등 승록사의 승직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태조실록』 7년 4월 11일) (『태종실록』 6년 6월 19일). 그런데 태종대에 육조의 직무를 분담하고 소속 아문을 상정하는 과정에서 승록사는 예조의 속아문이 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그에 따라 더 이상 독립된 관청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직제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승록사의 각종 보고는 예조를 경유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승록사가 담당하던 업무 중 도첩 발급은 예조로 이관되고(『태종실록』 8년 5월 10일), 승려의 고신을 서경하는 업무는 이조로 이관되었다(『태종실록』 16년 12월 18일). 그뿐 아니라 양반 자제가 출가를 희망하는 경우, 그 부모나 친족이 승록사에 알리면 승록사에서 이를 다시 예조에 보고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년 11월 7일). 이처럼 태종 연간에 이루어진 직제 개편으로 인해 그 위상은 격하되었으나, 승록사는 여전히 불교와 관련된 승정을 담당하는 중앙 관청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세종대에는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승록사 혁파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424년(세종 6)에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하면서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고 나머지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는 모두 환수하였는데, 이때 승록사도 혁파되었다. 이후 서울의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를 각각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지정하여 승록사를 대신해 승려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그리고 이때 혁파된 사찰과 승록사에 소속된 노비들은 양종의 도회소와 동부 학당(學堂) 및 서부 학당에 나누어 주었다. 승록사의 기능이 도회소로 이관되기는 하였으나, 도회소는 승록사 같은 중앙 관청은 아니었다. 따라서 승록사가 폐지되면서 종파의 구분 없이 불교 교단 전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앙 관청이 사라지고,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 종파별로 각각 관리하게 된 것이다. 비록 조선전기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해 승과가 유지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불교 교단의 공적 운영이라 할 수 있는 승정이 국가 운영 체계에서 배제되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문선(東文選)』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하(上·下)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 高雄義堅, 『宋代佛敎史の硏究』, 百華苑, 1975.
  • 사문경, 「고려말·조선초 불교기관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원영만, 「고려시대 승관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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