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승통(都僧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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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초의 승록사에 설치된 승관 또는 조선후기 오규정소나 표충사 등의 책임자 승려.

개설

고려시대의 도승통(都僧統)은 승록사(僧錄司)에 설치된 승관(僧官)이었다. 승정(僧政) 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에는 최고 승직으로 양가승총(兩街僧摠)·도승록(都僧錄)을 거쳐 후기에 도승통을 두고 그 아래 좌가(左街)·우가(右街) 도승록(都僧錄), 부승록(副僧錄), 승정(僧正) 등의 승관직이 마련되었다. 도승통은 이후 조선초까지 승직으로 유지되었다. 18세기에는 승려 감독기관인 규정소(糾正所)가 다섯 곳에 설치되면서, 그 책임자로 도승통이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었던 휴정(休靜) 등을 향사하는 밀양 표충사(表忠祠), 해남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의 책임자인 원장(院長) 밑에도 도총섭과 도승통을 두었다.

내용과 변천

고려시대에는 도승통이 승록사에 설치된 승관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 중앙 승관으로 양가승통(兩街僧統)을 둔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승정 제도가 갖추어져 승정 기구인 승록사에 초기에는 승총(僧摠), 중기에는 도승록(都僧錄)이 최고 직책이던 것이 후기에는 도승통 또는 도총섭(都摠攝)으로 바뀌었다.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등의 명칭도 나타난다. 양가도승통 아래 좌가(左街)·우가(右街) 도승록(都僧錄), 승록(僧錄), 부승록(副僧錄), 승정(僧正) 등의 승관직이 있었다.

조선초기의 승정과 관련된 각종 승관 및 승계 등은 고려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조실록』에는 1398년(태조 7)에 양가도승통 상부(尙孚)가 승려들의 음주를 금할 것을 청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태조실록』 7년 4월 11일), 이를 통해 승록사에 양가도승통이 설치되어 승려들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교종의 승계를 받았던 자은종(慈恩宗)화엄종(華嚴宗)의 경우, 조선초에도 자은도승통(慈恩都僧統)(『태조실록』 5년 3월 4일), 화엄도승통(華嚴都僧統)(『태종실록』 10년 9월 9일) 등의 명칭이 실록에 나타난다. 이로 볼 때 교종의 각 종파를 이끄는 고승에게 도승통이라는 승직이 내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에는 각지에 승려 감독기관인 규정소(糾正所)가 5곳에 설치되면서, 그 책임자로 도승통이 임명되었다. 1703년(숙종 29)에 전라도의 승려 통감(統監) 기관으로 좌·우 규정소가 각각 송광사(松廣寺)와 금산사(金山寺)에 설치되고, 도승통이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후 경상도에도 규정소가 설치되는 등 점차 확산되었다. 정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용주사(龍珠寺)를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로 지정하여 전국의 승려와 교단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용주사 주지 사일(獅馹)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사일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총섭(總攝)까지 겸임하였고, 용주사의 승도는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외영(外營)에 편입되었다. 이는 왕이 도승통을 통해 불교 교단을 장악하고 승군을 왕의 직속 군사 조직으로 삼은 것으로, 정조가 추구한 왕권 강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규정소의 승통제는 정조 사후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18세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공을 세운 승려들의 충의(忠義)를 기리며,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향사하는 사원(祠院)을 국가에서 세워 주었다. 승군을 이끌었던 휴정,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을 봉안한 밀양 표충사(表忠祠), 해남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는 종정(宗正)이나 원장(院長)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는데, 그 아래에 도총섭과 도승통 등을 두었다.

참고문헌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이정훈, 「고려후기 승려에 대한 봉군과 그 의미」, 『역사와 현실』80, 2011.
  • 정병삼, 「통일신라 금석문을 통해 본 승관제도」, 『국사관논총』62,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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