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戶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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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사회에서 국가가 호구 수의 파악, 신분의 판별, 세금 징수 등을 목적으로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장부.

개설

호적(戶籍)은 국가 내에 거주하는 모든 인민(人民)의 인적 사항, 즉 직역(職役)·성명·연령 등을 조사하여 가호(家戶) 단위로 정해진 양식에 따라 작성한 공문서를 말한다. 따라서 그 작성의 과정을 말할 때 호구성적(戶口成籍)이라고 하고, 작성된 결과물 즉, 공문서를 말할 때 호적 또는 호적대장(戶口帳籍), 판적(版籍)이라고 부른다.

호적 작성은 국가의 통치 영역 안에 거주하는 모든 호·구를 낱낱이 조사하여 국세(國勢)를 파악하려는 데 그 원칙적 목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과 세금을 부과·징수하기 위한 재원을 파악하는 것이 실질적 목적이자 기능이었다. 또한 신분 질서를 국가 통치의 주요 이념·체제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모든 인민의 신분을 파악하여 그 판별된 신분을 공적 문서에 명시하는 것도 호적 작성의 주된 목적·기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갑오경장에 따라 1896년 9월 1일부터 새로운 호적 제도가 실시되면서 신분을 확인하는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호구 조사 및 호적 작성의 기본 목적은 국력의 기준이 되는 호·구 수를 파악함으로써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보, 노동력과 세금을 부과·징수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분 질서 체제를 사회 운영의 공리(公理)로 인식한 조선시대에는 노동력과 세금의 부과·징수 목적 외에 신분 그 자체를 확인하는 것이 호적 작성의 또 다른 주요 목적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호적 조사는 국가의 주요 세원(稅源)인 인민들이 유망(流亡)하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태종실록』 8년 11월 23일).

내용

호구 조사 제도는 국가 권력의 형성과 함께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늦어도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5세기 이후부터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을 것이고, 이후 사회 체제가 변화하고 복잡해지면서 호구 조사의 제도 또한 발전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이해된다.

호구 조사 및 호적 작성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경우, 집권 체제의 인적·물적 기초가 되는 인정(人丁)의 확보를 위해 국초부터 대대적인 호적 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다. 조선 왕조는 간지(干支) 가운데 자(子)·묘(卯)·오(午)·유(酉)에 해당하는 해, 즉 식년(式年)마다 3년 간격으로 호적을 작성하는 것을 제도화했다(『성종실록』 2년 윤9월 7일).

그 작성 절차는 각 가호의 대표자인 호수(戶首)호구단자(戶口單子) 2통을 작성하여 관아에 올리면 관아에서는 그 호구단자를 3년 전에 작성한 옛 호적과 대조하여 허위 기재가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1통은 호수에게 되돌려주고 다른 1통은 새로운 호적을 작성하는 자료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현에서 작성한 호적은 4부를 만들어 해당 군현과 감영(監營)에 각각 1부씩을 보관시켰으며, 나머지 2부는 중앙의 호조(戶曹)한성부(漢城府)로 보내 보관시켰다.

새로운 호적이 작성되면 호수는 호적에 기재된 자기 가호의 기재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문서를 관아에 발급해 달라고 신청을 하였는데, 이때 발급한 문서를 준호구(准戶口)라 하였다.

호적은 각 가호를 기본 단위로 하여 5호를 1통(統)으로 묶고 이를 동리(洞里), 면(面), 군현 단위로 확대하여 묶어 작성했는데, 규모가 큰 군현의 경우 면 단위로만 묶어 작성하기도 했다. 호적에 기재된 내용은 호수의 직역(職役)·성명·연령·본관(本貫)뿐만 아니라 부·조부·증조부·외조부 등 4조의 직역과 성명, 처의 성명·연령·본관 및 4조의 직역·성명, 동거하고 있는 가족의 직역과 성명·연령, 소유하고 있는 노비와 그 부모의 성명·연령 및 변동 상황 등이었다.

한편,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호구 조사 및 호정(戶政) 운영을 보조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마련하여 실시했는데, 태종·세조·성종 때는 인보법(隣保法), 세조 때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등을 시행하였다. 비록 조선중기 이후 이 제도들은 유명무실해졌으나, 당시에는 향촌 사회 내 가호를 일정 단위로 묶어 이장(里長) 혹은 통주(統主)의 관장 하에 주민 생활을 상호 보조·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구 조사에서 은루(隱漏)하는 자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남정(男丁)에게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호패(戶牌)를 착용하게 하는 호패법을 실시하기도 했다(『숙종실록』 3년 3월 1일).

또한 지방 수령들은 개별적으로 가옥이 들어선 형세에 따라 가좌부(家坐簿)를 작성하여 각종 행정 업무와 호적을 작성하는 데 크게 참조하였다.

변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1896년(고종 33) 9월 1일 칙령 61호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을 공포하고, 이틀 후인 9월 3일 내무령 8호로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을 공포함으로써 조선시대의 호적은 근대적인 호적으로 그 내용 및 모습이 변하게 된다(『고종실록』 33년 9월 1일). 우선 호적의 작성 주기를 3년에서 1년으로 단축했으며, 그 작성 절차도 국가에서 인쇄하여 배포한 호적 양식표의 빈칸에 해당 내용을 기재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간편화하였던 것이다.

1896년에 새로 제정·실시된 호적 제도 및 내용을 이전 시기의 것과 비교할 때 가장 큰 변화는 신분 판별의 요소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전의 신분적 의미를 지닌 직역(職役) 대신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직업(職業)을 기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호적 양식표에 거주하는 가택(家宅)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이전 시기에 그 개념이 모호했던 ‘호(戶)’를 물리적 가택으로 분명히 하였다.

1909년(순종 2) 3월 법률 제8호로 「민적법(民籍法)」이 공포되어 4월 1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호구조사규칙」은 폐지되기에 이른다. 「민적법」은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주도로 제정·시행된 제도로, 그 주된 목적은 식민 통치를 위해 조선 내 인민을 간편하게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의 호적 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그 고유성을 상실하고 식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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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