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첩제(度牒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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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첩제 |
한글표제 | 도첩제 |
한자표제 | 度牒制 |
동의어 | 납정전급패법(納丁錢給牒法), 도승법(度僧法) |
관련어 |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 정전(丁錢), 시재행급첩법(試才行給牒法), 준역급첩제(准役給牒制), 행장제(行狀制), 환속책(還俗策), 억불(抑佛), 도승(度僧)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첩제(度牒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9월 24일, 『태종실록』 2년 6월 18일, 『태종실록』 2년 8월 4일,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세종실록』 27년 7월 15일 |
승려가 되려는 사람에게 국가가 일정한 대가를 받고 승려 신분을 공인해 주던 제도.
개설
불교에서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득도위승(得度爲僧)이라고 한다. ‘득도’란 산스크리트어의 ‘Pa'ramita’를 번역한 말로, 생사고해를 건너 이상향인 열반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도첩제(度牒制)의 도첩(度牒)은 바로 이러한 득도를 인정하는 증명서라는 뜻이다. 도첩제는 승려임을 인정하는 도첩을 국가에서 발행해 줌으로써 백성의 출가를 관할하는 제도였다.
도첩제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당나라 때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기부터 제도화되어 조선초기에 강화되었다. 고려시대의 승려는 대체로 10~15세에 출가하여, 먼저 행자 또는 동승으로서 사찰에서 생활하며 불학을 배우는 등 2~3년 동안 신앙의 기초를 익혔다. 이후 삭발하고 사미(沙彌)가 된 뒤 다시 2~3년의 수행을 거친 다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야 비로소 득도승(得度僧)으로 인정을 받았다. 사미승까지는 불교계 자체의 인정을 통해 될 수 있었지만, 득도승은 국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될 수 있었다.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인 구족계를 주고받는 의식은 득도를 인정받는 과정이었는데, 이 의식이 국가의 관리 아래에 있는 관단(官壇)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처럼 국가가 득도승을 관리하면서, 부녀자나 향부곡(鄕部曲), 진역(津驛) 및 양계(兩界)의 부역자 등의 출가를 법적으로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불교계의 방대한 경제력과 그 구성원인 승도(僧徒)의 수를 줄여 노동력을 확보하고, 승려를 효율적으로 통할하기 위한 조처였다.
조선시대의 도첩제는 출가를 제한하고 불교를 국가 통치에 예속시키기 위한 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1392년(태조 1)에 곧바로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양반은 포 100필, 서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의 정전(丁錢)을 납부해야 도첩을 주도록 규정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양반보다 양인에게, 양인보다 천민에게 정전을 더 많이 매긴 것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재가화상(在家和尙)이나 수원승도(隨院僧徒) 같은 부류가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용 및 특징
도첩제 내용의 핵심은 납정전급패법(納丁錢給牒法)과 시재행급첩법(試才行給牒法)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납정전급패법은 신분에 따라 각각에 해당하는 정전을 받고 도첩을 발급해 주는 것을 말한다. 시재행급첩법은 승려가 되려는 사람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도첩을 발행해 주는 제도를 가리킨다(『태종실록』 2년 6월 18일). 여기서 재주란 승도들의 학문과 덕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과거가 아닌 천거제(薦擧制)처럼 정시의 승과(僧科)나 승직의 제수와는 별도로 시험이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첩제의 시행은 억불 정책의 과정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사찰을 혁파하고 백성의 출가를 제한하는 방법이 무엇보다 효율적이었다. 태종은 1402년(태종 2) 교단과 사찰을 7종 242사 체제로 정비하면서, 양민 출가자는 부모가 그 사유를 관청에 신고하도록 하고 출가할 사람의 본관과 4대 조상까지 심사하여 절차에 따라 도첩을 발급하게 하였다(『태종실록』 2년 8월 4일). 그뿐 아니라 관청의 허가 없이 출가한 경우에는 그 이웃과 수령, 은사 승려에게까지 죄를 묻게 하는 등 도첩제를 강화하였다. 이듬해에는 유명 사찰 88사를 자복사(資福寺)로 교체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도첩제를 점검하여, 사찰에 머무를 수 있는 공인 승려의 수를 5,500여 명으로 제한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승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0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5,500여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승려들이 국가에서 공인을 받지 못한 무도첩승인 셈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무도첩승에 대한 구제책이 단행되었다. 즉 1403년(태종 3) 2월 11일 이전의 무도첩승은 정전을 면제하고 도첩을 주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정전급첩법(除丁錢給牒法)이다. 이 시책으로 많은 승려가 구제되었다. 그 뒤 1416년(태종 16)에는 다시 기한을 정하여 양민과 천인의 정전 납부를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불교를 숭상해서 시행한 조처라기보다 국가가 효율적으로 승려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인 승려 5,500여 명 외에 나머지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급해 주지 않을 경우, 시주를 권하러 다니는 승려 즉 연화승(緣化僧)의 폐행 등 사회적인 문제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도첩을 발급해 승적에 등록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선시대 초기에 승적에 등록된 승려의 수는 수만명이 넘었다.
변천
세종은 사찰에 속한 노비와 승려의 개인 노비인 법손노비(法孫奴婢)를 모두 혁거하여 승려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시켰다. 또한 도첩을 발급할 때, 관료가 입사(入仕)할 때의 예에 따라 서경(署經)하고 승려의 행장을 적도록 하여 도첩제를 강화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7종을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고, 국가에서 인정한 법정 사찰의 수를 242사에서 선종과 교종 각각 18사씩 도합 36사로 정리하였다. 더불어 사찰에 머물 수 있는 승려의 수를 5,500여 명에서 3,790명으로 축소하고, 정전 납부를 엄격히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전을 내고 출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정전의 법령은 문서에만 남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세종실록』 7년 6월 23일), 현실적으로 큰 실효는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도첩제를 응용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준역급첩제(准役給牒制)·행장제(行狀制)·환속책(還俗策), 그리고 정전(丁錢)의 교체 등이 그것이다. 1429년(세종 11)에는 흥천사와 태평관을 건립하는 데 승려를 동원하고, 공사에 참여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는 준역급첩제를 시행하였다. 행장제는 승려들의 인적 사항을 장적(帳籍)에 기록하여 승적을 관리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그러자 1439년(세종 21)에는 환속책을 시행하였다. 즉 40세 이하의 승려가 환속할 경우 도첩을 받은 승려는 승직에 따라 관직을 주어 군역에 충당하고, 무도첩 승려는 평민으로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효과가 없었다. 당시 정전을 바치고 승려가 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자가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세종실록』 27년 7월 15일). 이에 세종은 정전을 받고 도첩을 발급해 주는 납정전급첩제를 다시 강화하였다. 그리고 제도의 원활한 시행을 위해 현실에 맞는 정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1445년(세종 27) 정전의 품목을 5승포 대신 그 당시에 많이 유통되던 정포 30필로 바꿨고, 4년 뒤에는 다시 정포 20필·면포 15필로 조정하였다.
한편 조선초기에 서울의 사찰에 거주하는 승려는 대부분 양반의 자제였다. 양반은 출가한 뒤 승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승계(僧戒)를 받고 수행승이 되었다. 그에 비해 양인이나 천민 출신은 사찰 유지를 위한 노동과 시주 활동에 종사하였다. 도첩제와 정전의 규정은 현실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출가를 하려면 교종과 선종의 본산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한 뒤 포 30필을 정전으로 바치도록 조정하였지만, 이 또한 별 효과가 없었다.
이후 성종 연간에는 승려의 수가 140,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도첩인 공명첩(空名帖) 수천통이 발급, 매매되기도 하였다. 승려의 수는 도첩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1492년(성종 23)에는 도첩제를 폐지하고 출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기도 하였다. 1541년(중종 20)에는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을 시행하여 도첩제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승인호패법은 호패제의 일환으로, 승려를 가장한 유역인(有役人)이나 피역자(避役者), 도첩이 없는 승려가 일정한 국역을 마치면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는 제도였다. 그 뒤 1550년(명종 5)에는 도첩제를 다시 시행하였으나, 1566년(명종 21)에 폐지하고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묵인하였다. 1610년(광해군 2)부터는 승인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다가 1612년(광해군 4)에 폐지하였다. 이와 같이 도첩제는 시행과 폐지를 거듭했지만,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도첩제가 활발히 시행된 시기는 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국가적으로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였다. 고려 말기의 도첩제가 불교계의 지나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에서 출발했다면, 조선시대에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김영태, 「조선전기의 도승 및 부역승 문제」, 『불교학보』32, 1995.
- 안계현, 「여대 도승법에 대하여」, 『사학연구』4, 1959.
- 이승준, 「조선초기 도첩제의 운영과 그 추이」, 『호서사학』29, 2000.
- 최진석, 「고려후기의 도첩제에 대하여」, 『경희사학』3, 1972.
- 한우근, 「세종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진단학보』26, 진단학회, 1964.
- 황인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도첩제의 시행과 그 의미」, 『보조사상』22, 보조사상연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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