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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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승려에게 호패를 발급하던 제도.

개설

조선시대에는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신분 증명인 패(牌)를 발급하여 이를 지니고 다니게 하는 호패법을 시행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처음으로 실시했는데, 호구 파악, 유민 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 질서 수립 등을 통해 집권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뒤 1461년(세조 7)에는 이 호패법을 불교계에도 적용하여 승려에게 패를 발급하는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을 시행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는 각종 부역과 군역에 동원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출가를 제한하는 도첩제(度牒制)를 시행하였다. 1392년(태조 1) 태조는 승려가 되려면 양반은 포(布) 100필, 서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의 정전(丁錢)을 납부하고 도첩을 발급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전을 납부하고 승려가 되는 사례는 드물어, 조선시대 초기 10만여 명에 이르는 승려는 대부분 도첩이 없는 무도첩승이었다. 세조 연간에는 제도를 수정하여, 교종이나 선종의 본산에서 시험을 치르고 포 30필을 납부하면 도첩을 발급해 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492년(성종 23)에는 도첩제를 폐지하고 출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출가자는 계속 증가하였고, 조정에서는 군역 등을 확보하기 위해 1541년(중종 20) 승인호패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내용

승인호패법의 시행 목적은 승려를 가장하여 역(役)을 회피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도첩이 없는 승려가 일정한 국역을 담당하면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승려들은 많은 승역(僧役)을 부담하였다. 특히 한양에 도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승려는 없어서는 안 될 노동력이었다. 1412년(태종 12) 2월에는 행랑을 조성하면서 2,300여 명의 부역군을 동원했는데, 그 중 500명이 승려들이었다. 7월에 행랑을 조성할 때도 1,000명의 승려가 동원되었다. 또 이듬해에도 경복궁 남쪽부터 종묘 앞까지 좌우 행랑 881칸을 조성하고, 용산강에 군자고(軍資庫) 등을 건립하는 데 동원된 2,100여 명의 부역자 중에서 500명이 승군이었다. 이처럼 부역에 참여한 승려들은 모두가 도첩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형식은 자발적인 지원이었지만 반강제적인 동원과 다름이 없었다. 도첩을 받으면 군역을 비롯한 잡역에서 면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38년(세종 20)에 흥천사 사리각을 중수할 때는 승려 600명이 참여하였다. 부역에 자원하여 30일 동안 노역하면 도첩을 주고, 양식을 지참하면 15일 만에 도첩을 주었다(『세종실록』 20년 2월 19일). 그러자 승도가 대규모로 자원하였고, 이들을 절에서 다 수용할 수가 없어 근처의 여염집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변천

승인호패법은 도첩제의 존폐와 맥락을 같이한다. 1461년 세조가 처음 이 제도를 시행할 때는 호불책의 일환이었으나, 이후 도첩제를 대신하게 되면서 대표적인 억불 정책이 되었다. 1469년(성종 즉위) 도첩제가 다시 실시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541년에 다시 시행되어 1550년(명종 5) 도첩제가 부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566년(명종 21) 다시 도첩제가 폐지되면서 이후 도첩승과 무도첩승의 구분은 사라졌다. 승인호패법은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시행되었지만, 2년 만인 1612년(광해군 4)에 폐지된 뒤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배명애, 「조선전기의 승려통제책과 승역」, 『부대사학』30, 부산대학교 사학회, 2006.
  • 오경후, 「조선시대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107, 국사편찬위원회, 2005.
  • 이수환, 「조선전기 국가의 사원정책과 사원의 유교적 기반으로의 전화」, 『대구사학』79, 대구사학회, 2005.
  • 전영준, 「여말선초 도첩제 운용과 승도의 성격」, 『백산학보』70, 백산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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