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역(僧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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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에게 부과된 부역노동.

개설

승려를 군인으로 동원하여 승병을 조직하는 일은 삼국시기·고려시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수취제도의 한 형태로 승역이 정비된 것은 조선시기에 들어서였다. 조선왕조가 성립된 이래,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국가정책은 지속적으로 추구되었다. 도첩제(度牒制)·승인호패제(僧人號牌制) 등은 이 같은 원칙 아래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승려 인구를 억제하는 데에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자발적으로 편성된 승병은 전투뿐만 아니라 후방 지원에도 뚜렷한 활약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정부에서는 군공을 세운 승군들에게 선과첩(禪科帖)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승병 운영의 효율성을 인식한 지배층 관료들은 인조대부터 의승상번(義僧上番)제도를 시행하였다. 승도로 하여금 산성 수호의 임무에 종사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부역승군을 징발하여 각종 토목공사에서 사역하는 조치도 빈번히 취해졌다. 조선전기에도 정부가 도첩을 받지 못한 무도첩승(無度牒僧)을 징발하거나, 혹은 도첩과 관계없이 민정(民丁)의 요역노동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승도를 징발·사역하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각종 역사에 역승이 징발되는 일은 점차 특수한 것이 아니라 상례적인 것으로, 또한 보조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종래 민간에서 납부하던 공물의 일부마저 사찰에서 조달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잡역 부담을 증대시켰다.

17세기 이후 승역이 전반적으로 과도하게 부과되는 현상은 부역노동 전반이 물납세화되었던 일반적 추세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농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민간의 부역노동이 완화되고 현물세화되었을 때 승역은 재편성되고 강화되었다. 이처럼 승역이 강화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민간의 부역노동이 물납세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지배층 관료들이 새로운 부역노동 징발 체계를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농민의 부역노동을 징발하던 때에는 늘 시기적 제한이 따랐다. 농번기라든지, 한재·수재나 기근의 시기에는 요역을 징발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특히 농사철과 관계없이 수시로 징발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서 승도의 존재는 주목되었고, 승역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는 양란 이후 시행된 농민경제 안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특히 대동법 이후 농민의 요역 부담이 크게 완화되었으며, 그 일부는 승역으로 전가되었다. 예컨대 대동법을 시행한 이후 요역을 징발하기 어렵게 되자, 제언을 수축하는 토목공사 등에 흔히 승군을 사역한 일이 많았다.

둘째, 승역을 강화하는 일은, 억불책을 실현하려는 사상 정책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승도에게 무거운 부역노동을 부과하였던 것은, 억압을 가해서 환속을 강요하는 정책, 곧 양정(良丁)을 확보하려는 국가정책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지배층 관료들은 승도는 부역을 회피하려는 자이며, 농민의 미곡에 의지해 사는 놀고먹는 무리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승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백성은 곤궁해진다는 논리였다. 토목공사가 있을 때마다 먼저 승도를 부리고, 군사 경보가 있을 때에는 승군을 편성해 싸움터에 나아가게 하면, 비로소 승도 인구가 줄어들고 대신 농부와 군대의 수가 배로 증대할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당시 지배층 관료들은 승군의 노동력이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승군은 근실하며 고된 작업에 능숙하였다. 다른 형태의 일꾼들에 비해 인내심이 강한 수도자 집단이었으므로, 성실한 역군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이들은 힘든 부역노동에 능숙하고, 매우 용감하게 참여한다는 평판이 따랐다. 게다가 승군은 나름의 명령 체계와 조직 편제를 갖추고 있어서 토목공사와 같은 분야에서 높은 효율성을 발휘하였다.

17세기 초엽 이후 승역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부역노동이 해체되고 있던 양상과는 크게 달랐던 만큼, 승군들의 피역과 저항을 초래했다. 게다가 승역의 무거운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각지의 사찰들은 피폐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사찰과 승도 집단은 산성의 방어라든지, 중앙과 지방관서의 잡물을 조달하는 잡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정한 범위 내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지배기구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필요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승역은 현저하게 완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승역의 부역노동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였다.

담당 직무

조선후기의 승역은 종래 민호가 부담하던 요역노동을 대신하는 성격을 지녔다. 특히 각처의 산성을 짓고 수리하는 일, 산릉을 조성하는 일, 제언을 축조하고 수리하는 일 등에는 많은 수의 승군을 징발해서 사역하였다.

승역의 강화는 다시 의승의 군역을 승도들에게 부과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양인 농민의 군역에 비견되는 승인의 신역이었다. 군역이 동요하는 가운데, 그 변형된 형태로서 의승역이 승도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의승역은 전국 각 사찰이 새로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의승의 제도는 인조 초엽, 남한산성의 축조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조되자 여기에도 의승을 상번하도록 하였다. 1714년(숙종 40)에는 판부사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외방의 사찰에서 승도의 수를 조사해서, 남북한 의승의 정원을 각 350명씩으로 정하여, 윤번으로 입역하게 하였다. 각 도의 의승들은 상번할 때마다 소속 사찰에서 부번(赴番)의 비용을 지원받았다. 많은 경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에 의승 자신은 물론 외방의 사찰들이 피폐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남 지방의 의승이 한 차례 상번하는 데에는 30량의 경비가 든다고 하였다. 균역법 이후 양인 농민이 1인당 면포 1필의 군역세를 부담하였던 사정과 비교해 보면, 수십 배에 달하는 무거운 부담이 의승의 명목으로 주어졌다.

한편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산성에서도 승병을 편성하였다. 예컨대 1640년(인조 18) 승군을 징발해서 무주적상산성을 수축한 뒤에, 다시 승도를 이곳에 모아 들이는 조치가 있었다. 험준한 지형에 승도가 아니고서는 수호할 군사력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승군을 모아 축성역에 사역할 뿐 아니라, 그대로 수성(守城)의 승군으로 편제하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방식은 조선후기 전국 곳곳의 산성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다.

승역의 강화는 사찰에서의 잡역 수취를 강화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지방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잡물을 조달하기 위해서 사원 잡역을 부과하였다. 관가에서뿐 아니라 지방의 양반 사대부들이 사찰 승려를 침학하는 폐단도 만연했다. 승역이 잦고 무거워지자 사찰은 피폐하게 되고 승도들은 다시 피역을 꾀하거나 심지어 유랑하게 되었다. 18세기 말엽 『부역실총(賦役實摠)』에 나타난 모든 군현의 재정 수입원 중에는 승도로부터의 잡물 징수에 관한 것이 거의 예외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원 잡역은 조선후기 지방관부의 재정 운영에서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변천

17세기 이후 요역제가 물납세로 개편되는 과정을 보일 때, 부역노동의 특수한 형태였던 승역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승역은 일시적인 조치가 아니고, 상례적·고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수취제도의 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는 역제 전반이 동요하고 있었던 현실적인 추세를 역행하는 것이지만, 바로 거기에 승역이 강화될 필요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역제가 동요하는 시기에 지배층 관료들은 승역의 강화를 통해서 부분적이나마 재편성을 꾀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승역은 종래 민호가 부담하던 요역노동을 대신하는 성격을 지녔다. 승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승역의 강화는 다시 의승의 군역을 부과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양인 농민을 대상으로 한 군역이 동요하는 가운데, 그 변형된 형태로서 의승역이 승도들에게 부과된 것이었다. 승역의 강화는 대동법 이후 사원에서의 잡물 수취를 강화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지방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잡물을 조달하는 일이 사원의 새로운 잡역으로 지워졌다. 이 같은 일련의 조치는 사회적으로 승도의 지위가 천시되던 현실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였다.

산릉역에서 승군이 징발되던 일은 17세기 초엽에서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의 산릉역에는 전국의 승군이 동원되었다. 승군은 축성역에도 징발되었다. 그것은 중앙정부에 의해 전국을 대상으로, 혹은 지방관에 의해 관내의 승도를 징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승역 강화의 조치는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각지의 사찰이 피폐하고 몰락하는 가운데, 승역 또한 동요·완화될 수밖에 없었다. 의승 상번의 역은 1756년(영조 32) 번전(番錢) 대납제인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의 제도로 바뀌었고, 이듬해의 산릉역을 마지막으로 국가적 대규모 역사에서의 징발 또한 비로소 그치게 되었다. 부역노동으로서의 승역이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의의

17세기 이후 승군은 공식적인 부역노동의 담당자로서 파악되었다. 각지의 승군들은 축성역이나 산릉역 등 각종 역사의 부역군으로서 징발되고 있었다. 또한 승군은 의승의 군역, 그리고 지방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물자를 조달하는 사원 잡역도 걸머지고 있었다. 조선후기 승군의 부역노동은 종래 농민이 부담하던 요역·군역·공납의 부역노동을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전가받게 된 것이었다. 역제가 붕괴 과정을 보일 때 지배층 관료들의 대응 방식은 이처럼 승역을 재편·강화하는 데서 하나의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승역 또한 18세기 중반 이후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해체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윤용출, 「조선후기 산성의 축조와 승역(僧役)」, 『문화로 보는 한국사 2-물질문화와 농민의 삶』,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