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복사(資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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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에 고려의 비보사찰을 재정비하여 지정한 지방 군현의 중심 사찰.

개설

고려시대에 전국 각지에 위치한 비보사(裨補寺)를 조선초기에는 자복사(資福寺)라 불렀다. 태종대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을 공식화한 뒤 다시 7개 종파로 축소, 통합할 때 88개의 자복사를 산간에 위치한 명찰로 대체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된 조치로, 고려시대의 유산인 자복사는 세종대에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구축되면서 혁파되었다.

변천 및 내용

자복사는 조선초기에 비보사찰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하였으며, 특히 태종과 세종대에는 불교 종파를 축소하고 비대해진 사찰의 경제 기반 상당수를 환수하는 억불 정책이 단행되었다. 먼저 1406년(태종 6) 3월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을 제외한 전국 사찰의 전민(田民)을 정리하여 전지 3만~4만결, 사사노비(寺社奴婢) 8만명을 속공(屬公)하였다. 이때 지정된 242개 사찰을 종파별로 나누어 보면,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을 합쳐서 70개 사찰, 천태종(天台宗) 계열인 소자종(疏字宗)법사종(法事宗)을 합쳐서 43개, 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을 합쳐서 43개, 자은종(慈恩宗)이 36개, 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을 합쳐서 30개, 남산종(南山宗)이 10개, 시흥종(始興宗)이 10개 사찰이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듬해인 1407년(태종 7) 12월에는 11개 종파를 조계종·천태종·화엄종·자은종·시흥종·중신종·총남종 등 7개로 축소, 통합하였다. 또 지난해에 사찰을 혁파할 때 유서 깊은 대가람이 오히려 누락되고 이미 없어진 사찰에 주지가 임명되기도 하는 등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산수(山水) 경치가 좋은 대가람을 선정해 문제가 있는 사찰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이에 88개의 명찰을 새로 선정해 기존의 자복사를 대체하였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 조치의 특징은 서울과 각 도의 계수관(界首官) 주재 지역 밖에 위치한 사찰은 그대로 둔 채 자복사 88개만을 교체했다는 점인데, 이는 지역 질서의 개편과 자복사의 성격, 242개 사찰의 선정 과정 등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는 조선이 개국된 뒤 지방관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역 지배 질서가 강화되면서, 향리가 주도해 온 고려시대의 향촌 지배 질서를 대체해 가던 시기였다. 또 유교적 예제를 지방 단위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제도와 전통을 부정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에 위치한 자복사는 고려시대 비보사의 유산이자 상징이었고, 따라서 유교적 건축물과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혁파해야 할 대상이었다.

한편 242개 사찰의 선정은 고려시대의 밀기(密記)에 수록된 주현 단위의 비보사와, 당시에 지방관의 실태 조사를 통해 얻은 답산기(踏山記)를 그 근거로 하였다. 이는 사찰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에 앞서, 군현별로 자복사를 비롯한 해당 지역의 사찰을 파악한 결과였다. 이를 바탕으로 242개 사찰을 지정할 때 읍내의 자복사에는 토지 20결(結)과 노비 10명을 지급하고, 10명의 거주승을 허용하였다. 그에 비해 읍 밖의 사찰에는 토지 60결과 노비 30명을 지급하고, 30명의 거주승을 인정해 주었다. 그 결과 읍 밖의 사찰은 읍내의 자복사에 비해 약 3배에 이르는 규모로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읍내의 자복사가 공인에서 누락되는 경우, 그 대신 읍 밖에 위치한 명찰이 새로 선정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많은 토지 및 노비의 소유를 인정받고 다수의 승려가 거주할 수 있는 길이었다. 결국 새로운 지역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읍내의 사찰을 없애려는 정책적 방향과, 해당 지역 승려나 사찰의 현실적인 이익이 만나는 접점이 바로 읍내 자복사의 명찰 대체였던 것이다.

이때 새로 지정된 88개 사찰을 종파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조계종은 통도사(通度寺)·인각사(麟角寺)·징광사(澄光寺)·도갑사(道岬寺)·만덕사(萬德寺) 등 24개, 천태종은 청계사(淸溪寺)·용천사(龍泉寺)·무위사(無爲寺) 등 17개, 화엄종은 법천사(法泉寺)·전향사(栴香寺)·성불사(成佛寺) 등 11개, 자은종은 성주사(聖住寺)·신이사(神異寺)·감로사(甘露寺)·법륜사(法輪寺) 등 17개, 중신종은 군니사(君尼寺)·견불사(見佛寺)·미륵사(彌勒寺) 등 8개, 총남종은 창화사(昌和寺)·삼화사(三和寺)·천왕사(天王寺) 등 8개, 시흥종은 오봉사(五峰寺) 등 3개 사찰이 포함되었다.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 3월에는 유명무실해진 각 관(官)의 자복사를 모두 혁거하라는 명에 따라 자복사를 전면 폐지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13일). 뒤이어 4월에는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하였는데,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선종으로 합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교종으로 통합하였다. 또 승려의 인사 문제와 불교 교단의 관리를 주관해 온 기관인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그 대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각각 서울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설치하였다.

이때 선종과 교종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사전(寺田)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계 7,900여 결의 소유가 인정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들 36개 사찰은 대부분 지방 군현이 아니라 도 단위 이상에서 지정되었고, 그중 20개 이상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로서 지속적인 보호와 후원을 받았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병희, 『고려후기 사원경제 연구』, 경인문화사, 2008.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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