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관(界首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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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도에서 읍격이 높고 행정 중심이 되는 도시.

개설

계수관(界首官)은 도내에서 읍격이 높고 행정의 중심이 되어 그 도를 대표하는 고을로 행정단위는 주로 목(牧)이나 부(府)에서 선정되었다. 8도의 도명은 바로 이 계수관 중에서 대표적인 고을의 명칭을 한 글자씩 따서 명명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도가 지방을 통치하는 군현의 유일한 상위 기구였고, 계수관은 정식 행정단위가 아니라 한 도를 대표하는 군현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계수관은 지방행정의 편의상 많은 행정 영역에서 도와 군을 연결하는 중간적인 광역 행정단위로 기능했다. 또 모든 계수관은 진관 체제에서 거진(巨鎭)이 되어 진관 운영의 중추가 되었다.

설립 경위

고려초부터 도제(道制)가 시행되었지만 도의 영역이 자주 바뀌고, 행정 권한도 확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도의 기능을 계수관이 주로 담당했다. 조선은 건국 후 도제를 확고히 하고, 관찰사의 권한을 강화했다. 조선의 지방행정 기구를 보면 크게 도와 군현으로 구분되고 군현에는 읍격에 따라 부윤부, 목, 대도호부, 도호부, 군, 현의 등급이 있었지만, 상위 군현이 하위 기관을 통솔하지는 않았다. 모든 군현은 도를 통하여 정부의 지시를 받고 정부에 보고를 하였으며, 도로부터 업무 감찰을 받았다.

이처럼 조선의 계수관은 고려와는 달리 군현에 미친 영향이 퇴색하였다. 그러나 계수관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1393년 11월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를 제외한 각 도의 계수관을 정했는데, 한양과 개성을 포함해서 24개 군현을 지정했다(『태조실록』 2년 11월 12일). 이는 고려시대의 유제(遺制)를 보여 준다. 그러나 1414년까지 8도제가 정립하면서 계수관은 1도당 2군현으로 축소되고, 계수관의 명칭을 따라 도명을 정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내용 및 특징

지방행정 기구를 도와 군현으로 일원화했지만, 도 단위로 군현을 동원하지 않고 도내의 행정 구역을 분할해서 돌아가며 동원하거나 특정 공물의 조달과 같이 일부 군현만 동원할 필요가 있는 사업이 있었다. 또 조선시대는 교통과 숙박이 불편해서 노비 변정(辨正) 사업, 진휼, 지방에서 치르는 감시(監試), 의녀 양성과 선발 같은 것을 감영 소재지에서 처리할 경우 왕래와 관리가 불편하고 지방 간의 불평 등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정, 지방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과거 시험, 학교, 인재 선발, 진휼, 지방 제사, 공물, 진헌물의 조달이나 제조, 사신 접대, 양전(量田) 등에서 계수관을 활용할 것이 요청되었고, 계수관이 이 분야의 정사를 주관하거나 담당하였다.

계수관은 휼정(恤政)의 단위로도 사용되었다. 흉년으로 공물이나 진상, 신년의 표문과 하례 등을 정지할 때는 일반 군현을 면제하고 계수관에서만 시행하게 하기도 했다.

계수관이 더욱 유용했던 것은 군사 제도였다. 각 도의 습사(習射), 취재(取才), 검열(檢閱), 도시(都試), 군사훈련, 화약 제조, 무기 제조, 군기 조달 등은 감영 단위로 시행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계수관 단위로 시행되었다. 진관 체제가 시행된 이후로 계수관의 군사적 기능은 진관 체제로 이행되지만, 진관은 거의 계수관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계수관의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은 군사행정 구역과 민사 행정 구역의 일치를 추구했다. 민사 행정상으로 각 군현은 상하 관계가 아니었으나 진관이 계수관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군사행정에서는 상하 관계가 설정되었다. 진관 체제가 철폐된 후기에도 속오군을 관리하는 군사행정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계수관이 중간 행정 단위로서도 기능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계수관은 단지 상대적으로 큰 도시일 뿐, 하위 군현을 통솔하는 권한은 없었으므로 이런 각종 임무가 계수관의 재정에 큰 고통이 되기도 했다.

변천

1414년에 정착된 계수관제는 세종 말에 이르러 도별로 그 수가 4~5개 군현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곧 2소로 축소되어 후대로 계승되었다. 계수관이 지방행정에 끼친 기능은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계속되지만, 조선전기에 비해서는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주로 제례와 관련해서는 활용도가 높았다. 한편 간혹 관내의 반역, 불효, 수령 능욕 등으로 목, 도호부, 군 등이 현으로 읍호가 강등되었는데, 이 중 계수관이 그 대상이 될 경우는 새로운 군현을 계수관으로 삼았고, 그에 따라 도명이 개칭되었다. 또 읍호가 강등된 계수관이 읍호를 회복하고 다시 계수관이 되면 도명도 복구되었다. 『대전통편』에서는 지방 향교 재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군현 향교에서 치제(致祭)하던 동서 양무(兩廡)의 신위에 대한 제사를 면제하고, 도와 계수관에서만 시행하게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존희, 「선초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 15·16,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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