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사(萬德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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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만덕사 |
한글표제 | 만덕사 |
한자표제 | 萬德寺 |
상위어 | 자복사(資福寺) |
관련어 | 원묘(圓妙), 요세(了世), 백련결사(白蓮結社), 백련사(白蓮社), 조계종(曹溪宗), 자복사찰(資福寺刹), 효령대군(孝寧大君), 행호토성(行乎土城), 국사(國師), 종사(宗師), 혜장(惠藏), 정약용(丁若鏞), 다산초당(茶山草堂)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
시대 | 통일신라~현대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만덕사(萬德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태종실록』 7년 12월 9일 |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만덕산에 있는 백련사의 옛 이름.
개설
만덕사(萬德寺)는 839년(신라 문성왕 1) 무염(無染) 국사(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1211년(고려 희종 7) 원묘요세가 만덕사의 옛터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결성해 천태종의 중흥을 가져오면서 절 이름도 백련사(白蓮社)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조선후기에도 여러 차례 절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에 8명의 국사(國師)와 조선시대에 8명의 종사(宗師)를 배출하며 이어져오고 있다. 백련사 인근에는 정약용 실학사상의 산실이 된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고려시대
839년 무염(無染) 국사(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천태의 가르침을 깨달은 원묘요세(圓妙了世)가 1211년 강진 지방민의 후원을 받아 폐사된 만덕사(萬德寺)의 옛터에 80칸의 절을 크게 중창하며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결성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수선사(修禪社)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던 반면, 요세의 백련사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求生)에 전념했고 염불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만덕사가 백련결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절 이름도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백련사에서는 120년간 원묘 국사를 비롯해 정명 국사, 원완 국사, 진정 국사, 원조 국사, 원혜 국사, 진감 국사, 목암 국사 등 8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백련사에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이 개설되면서 천태종의 중흥을 이끌었던 것이다. 고려말에 백련사는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의 위기에 처하며 겨우 절의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탐진(耽津, 현 전라남도 강진) 만덕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탐진 만덕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고려후기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 불교계의 중흥을 이끌었던 만덕사가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계종 사찰로 바뀌었음이 주목된다. 절 이름이 백련사에서 다시 만덕사로 바뀐 것도 소속 종파의 변경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만덕사는 조정으로부터 자복사찰로 지정된 후에도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에 의해 절이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9일). 1426년(세종 12) 만덕사 주지 행호(行乎)는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지원을 받아 불에 탄 절을 중수했다. 동원 20동과 서원 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行乎土城)을 쌓았던 것이다. 효령대군은 만덕사에 들어와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불·법·승 3보(三寶)에 기원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만덕사를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蒼翠)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다."라고 할 정도로 주위의 경관이 빼어난 절로 유명했다.
(3) 조선후기
1621년(광해군 13)부터 1627년(인조 5) 사이에 절이 중수되어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고, 다시 효종 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후기 만덕사에는 청허휴정(淸虛休靜)의 의발을 전수받은 소요 대사, 해운 대사, 취여 대사, 화악 대사, 설봉 대사, 송파 대사, 저암 대사, 연파 대사 등 8명의 종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연파 대사는 아암 혜장(惠藏)으로, 당시 강진에 유배중이던 정약용(丁若鏞)과 만덕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면서 교류하여 사제 관계를 맺은 인물로 유명하다.
문화재
백련사사적비(白蓮社事蹟碑, 보물 제1396호)는 1681년(숙종 7) 탄기가 백련사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세운 것으로, 앞면에는 백련사의 역사, 백련결사, 원묘 국사의 행장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당시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외에 백련사 대웅전(白蓮社 大雄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 등이 있고, 백련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유배 온 정약용이 1808년(순조 8)부터 10년간 머물면서 만덕사에 온 혜장 선사와 차를 마시며 학문을 토론한 곳으로 유명하다. 절 주위에는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덕사지(萬德寺志)』
- 『동문선(東文選)』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