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남종(摠南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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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총남종 |
한글표제 | 총남종 |
한자표제 | 摠南宗 |
상위어 | 선종(禪宗) |
하위어 | 남산종(南山宗), 총지종(摠持宗) |
관련어 | 계율종(戒律宗), 교종(敎宗), 선교양종(禪敎兩宗), 승록사(僧錄司), 오교구산(五敎九山), 오교양종(五敎兩宗), 지념업(持念業)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초기 |
집필자 | 김용태 |
폐지 시기 | 1424년(세종 6)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총남종(摠南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세종실록』 6년 4월 5일 |
조선 태종대의 7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총지종(摠持宗)과 남산종(南山宗)이 통합되어 성립된 종파.
개설
총남종(摠南宗)은 조선 태종 연간인 1407년(태종 7)에 11개의 불교 종파를 7개로 축소·통합할 때, 밀교(密敎) 계통의 총지종과 계율종(戒律宗)인 남산종을 합쳐서 만든 종파이다. 이후 세종대에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출범하면서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에 편입되었다.
설립 배경과 연원
총남종은 조선 태종대에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 만든 종파이다. 총지종은 밀교 계통의 종파로, 신라의 혜통(惠通)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 종파로서 성립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대개 지념업(持念業)으로 불렸다. 남산종은 신라의 자장(慈藏)에 기원을 둔 율종 계통의 종파로, 고려시대에는 오교구산(五敎九山)과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오교에 속한 계율종으로서 전통을 이어 왔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대에 억불 정책이 가시화되었다. 1406년(태종 6)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공인하고 해당 사찰의 사사전(寺社田) 및 사사노비(寺社奴婢)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 밖의 사찰에 속한 전지와 노비는 대거 속공(屬公)하였다. 그 당시 공인된 11개 종파는 총지종과 남산종을 비롯해 조계종·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법사종(法事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시흥종(始興宗) 등이었다. 이때 총지종에 속한 사찰은 조계종과 합쳐 총 70개 사찰이 공인을 받았고, 남산종에 속한 사찰은 10개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듬해인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가 다시 7개로 축소, 통합되었다. 조계종·자은종·시흥종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으로,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으로 통합되었다. 또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되었고, 총지종과 남산종은 총남종으로 합쳐졌다. 그와 더불어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다. 총남종의 경우에는 강음 천신사(天神寺), 임진 창화사(昌和寺), 삼척 삼화사(三和寺), 화순 만연사(萬淵寺), 나주 보광사(普光寺), 창평 서봉사(瑞峰寺), 인제 현고사(玄高寺), 계림 천왕사(天王寺) 등 8개 사찰이 공인 사찰로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총남종은 조계종·천태종과 함께 선종에 편제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참고문헌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영태, 「오교구산에 대하여」, 『불교학보』16, 1979.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 春秋社,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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