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사(三和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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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 두타산에 있는 절.

개설

삼화사(三和寺)는 통일신라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창건 당시에는 삼공암(三公庵)이라고 했다. 고려 태조가 삼화사로 고쳤고 공민왕 때 중건하였다. 조선 태조 때 수륙도량(水陸道場)으로 지정되었고, 태종 때 총남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지만 18세기 영조 때 중건하였고, 이후에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가 이루어졌다. 20세기 초에는 의병 운동의 거점이 되어 사찰이 불타기도 했다. 1977년 무릉계곡 입구에 있던 절이 기업의 채광권에 포함됨에 따라 지금의 삼화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2013년 12월 삼화사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삼화사 창건에는 세 가지 설화가 전해온다. 먼저 『삼화사사적(三和寺史蹟)』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자장(慈藏)이 당(唐)에서 귀국하여 두타산에 와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하고, 『강원도지』에서는 신라하대인 829년(신라 흥덕왕 4)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864년(신라 경문왕 4) 사굴산문(闍崛山門)의 범일(梵日) 국사(國師)가 절을 짓고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이곳에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와 무언가를 논의하고 떠나자 사람들이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고, 얼마 후 범일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삼화사가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은 그 신빙성이 떨어지고, 통일신라말에 선종 사찰로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고려 태조왕건은 신인이 절터를 알려 준 것이 신기한 일이고, 삼국통일이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로 고쳤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시인인 동안 거사이승휴(李承休)가 외가 고장인 삼척에 머물며 삼화사에 왕래하였는데, 두타산 자락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었다. 고려말인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절이 풍우로 퇴락한 것을 나옹 스님이 중건했다고 한다.

(2) 조선전기

조선 개국 초인 1395년(태조 4)에 삼화사는 관음굴, 현암사와 함께 매년 나라에서 봄·가을로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는 수륙도량(水陸道場)으로 지정되었다(『태조실록』 4년 2월 24일). 태조이성계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왕씨(王氏) 일가를 비롯한 영혼을 천도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해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설행했던 것이다. 삼화사는 이 맥을 이어받아 현재도 매년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를 열고 있다.

1407년(태종 7) 12월, 삼척 삼화사가 총남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삼척 삼화사는 총남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삼화사가 조선초에 수륙도량으로 지정된 데 이어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곳이 영동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구의 방화로 절이 전소되었다.

(3) 조선후기

1660년(현종 1) 무릉계곡 상류에 절을 이건하고 중대사(中臺寺)라고 하였다. 1748년(영조 24) 무릉계곡 입구의 삼화사 구지인 최하중대(最下中臺)에 절을 중건하고 다시 삼화사(三和寺)라고 하였다. 1820년(순조 20) 산불로 절이 소실되었고, 다음 해인 1821년에 삼척부사이규건이 중건했다. 1829년(순조 29) 산불로 다시 절이 소실되었고, 다음해인 1830년 법당, 선실, 약사전 등을 중건하였다.

(4) 근현대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인 1905년 절이 삼척 지방 의병(義兵)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자 1907년 일본은 의병의 거점 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이 다시 건립되었다.

무릉계곡 입구에 있던 절이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광권에 포함됨에 따라 최하중대(最下中臺)에서 무릉계곡 내인 지금의 삼화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 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범종각, 육화료, 천왕문, 요사채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삼화사 터에는 당시의 건물지와 기단축대, 초석 일부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고려, 조선시대의 기와편과 백자 등의 유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2012년 2월 강원도 동해시는 현재의 삼화사 자리로 이전하면서 공터로 남아 있는 옛 삼화사 터를 발굴,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삼화사는 동해불교대학, 바라밀유치원, 노인요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재

삼화사삼층석탑(三和寺三層石塔, 보물 제1277호)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형식의 석탑이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도 보기도 한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292호)은 삼화사 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크기는 145㎝이다.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철불 가운데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국행수륙대재 의례서 덕주사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6호)과 갑사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0호)이 있다.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가 1395년(태조 4) 삼화사에서 설행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2000년부터 수륙재의 지속적인 복원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2013년 12월 삼화사 국행수륙대재가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삼화사사적(三和寺史蹟)』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가람고(伽藍考)』
  • 『강원도지(江原道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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