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사(龍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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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중 하나로,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비슬산에 있는 절.

개설

용천사(龍泉寺)는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의상이 창건하고 옥천사라 하였고, 화엄10찰 중 하나였다. 1267년(고려 원종 8) 일연(一然)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용천사(湧泉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 천태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인조 때 조영이 중창하였고, 순조 때 의열이 크게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670년(신라 문무왕 10) 의상(義湘)이 창건하였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창건 당시 백련암과 극락암 등 모두 47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3,000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큰 절로 성장하였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화엄종 사찰인 화엄10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였다고 전하나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1267년(고려 원종 8) 일연(一然)이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칭했다가 다시 현재의 용천사로 바꾸었다.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2) 조선전기

1407년(태종 7) 12월, 대구 용천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대구 용천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로, 조선초기 용천사가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태종실록』에서는 ‘용천사(湧泉寺)’를 ‘용천사(龍泉寺)’로 기록하였고, 용천사가 있는 비슬산(琵瑟山)이 대구와 청도에 걸쳐 있던(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옥포면·가창면,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관계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대구 용천사라고 한 듯하다.

(3) 조선후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31년(인조 9) 조영(祖英)이 중창하였다. 1805년(순조 5) 의열(義烈)이 만세루, 봉향전, 수월료, 괘월료, 응진전, 시왕전 등을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

(4) 근현대

1907년 신도들이 불사를 위해 계(契)를 만들어 법당을 중수하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종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의 말사이다.

문화재

용천사대웅전(湧泉寺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5호)은 조선 인조 때 건립되었다.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고 내부에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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