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사(月光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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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월광사 |
한글표제 | 월광사 |
한자표제 | 月光寺 |
관련어 | 학조(學祖), 학전(學田), 둔전(屯田), 향교(鄕校)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경상남도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월광사(月光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1년 4월 13일, 『성종실록』 21년 6월 9일 |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현에 있던 절.
개설
월광사(月光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현 북쪽 5리(약 2㎞)에 있는 절이라고 한다. 대가야(大伽倻)의 마지막 태자 월광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는데, 두 탑은 그 크기나 양식이 같아 조형적으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세부는 많은 차이점을 가져 서탑은 8세기, 동탑은 9세기 조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 성종대 월광사의 토지를 해인사에서 소유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가 빈번하게 올라와 논란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인 성종대에는 절터와 절 소유의 토지만 남아 있었다. 이에 합천군에서는 월광사에 속해 있던 토지를 향교(鄕校)의 학전(學田)으로 귀속시켰다.
그런데 정희왕후의 명을 받고 해인사 판당의 중창 불사를 진행하기 위해 합천으로 내려간 학조(學祖)가 이곳에 다시 승려를 파견해 농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 사건은 조정에 보고가 되었고, 학조를 국문하라는 주청이 빗발쳤다. 하지만 성종은 학조를 국문하지 말고 학전으로 주었던 토지를 월광사에 도로 귀속시킬 것을 명하였다(『성종실록』 21년 4월 13일).
이 사건은 성종과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에서 거론되어, 장령(掌令)정광세(鄭光世), 영사(領事)윤필상(尹弼商)이 이미 학전으로 준 것을 사찰에 되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경국대전』에 경작하지 않고 버려둔 채 3년이 지난 토지는 신고하고 경작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토지가 묵혀 둔 지도 오래되고 이미 5년 전(성종 16)에 학전에 속하고 지난해에 소송이 일어났으므로 그 기한도 지났기 때문에 월광사에 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땅을 되돌려주는 문제에 대한 물의는 계속되어 여러 신료들의 상소가 계속되었고 왕은 호조와 승정원에서 알아보도록 명하였다. 결국 사찰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월광사의 토지는 향교의 학전으로 쓰도록 결정되었다(『성종실록』 21년 6월 9일).
월광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있고, 그 옆에 새로운 사찰이 창건되었다.
참고문헌
- 『도은집(陶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