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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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군현에 설치된 관립 유학 교육기관.

개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관학(官學) 교육기관으로, 교궁(校宮)이라고도 하였으며 1군(郡: 부윤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1향교 체제로 운영되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교관을 파견하거나 생도의 정원을 정하는 등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려는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향교에서는 유교 경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강경(講經)제술(製述)을 평가하였다. 중앙의 이런 노력에도 향교 교육은 16세기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17세기에는 교관조차도 파견되지 않았는데 양반들이 향교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에는 역(役)을 피하기 위해 중인이나 서얼, 그리고 평민들이 향교에 입속하였다. 고강을 통해 이들을 군역에 충당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조선후기 향교는 교육적 기능보다는 제향 기능이나 향촌의 자치적인 기능이 주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향교는 신라 때 청주(淸州: 현 청주시) 등 일부 지역에 설치된 교육기관이며, 고려 초부터 상당수 지방에 향교가 증설되면서 운영되었다. 그러나 주된 종교가 불교라는 점과 지방 제도의 한계 등으로 향교 교육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향교를 통한 생도 교육의 강화를 지시하였고[『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태종대에 지방 제도의 정비와 결합되면서 점차 1군 1향교 체제가 완성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은 건국 초부터 지방 향교에서 교육을 전담할 교관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태조대에는 각 도에 소속된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으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태종 초반에는 경전에 능통하고 노성한 선비를 골라 교수에 충당하도록 하다가[『태종실록』 4년 8월 20일] 1414년(태종 14)부터는 중앙에서 주(州)·부(府)에 교수관이라는 이름으로 교관을 파견하고, 군현에는 학장(學長)을 차출하여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4년 6월 2일].

이어 1416년 8월에는 교관을 유학교수관·훈도관(訓導官)·교도(敎導) 등으로 등급을 나누어 제수하였다. 유학교수관은 문과 출신인 6품 이상을, 훈도관은 문과 출신인 참외관을, 교도는 생원과 진사를 각각 지칭하였다[『태종실록』 16년 8월 10일]. 제주의 경우에는 제주목사가 교수관을 겸하기도 하였고[『태종실록』 18년 4월 18일], 1421년(세종 3) 3월에는 제주의 대정현과 정의현에 겸교도(兼敎導)를 두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년 1월 13일].

그러나 유학교수관 등으로 차출된 교관들이 지방으로 가기를 꺼리자 처벌 조항을 제정하는 동시에 이들에 대한 특전이 마련되었다. 즉, 품계를 올려 주는 가자(加資)의 특전을 주거나[『세종실록』 7년 2월 14일](『세종실록』 8년 12월 24일) 녹봉을 지급하는[『세종실록』 즉위 12월 17일] 한편 교도에게는 문과 응시에 일정한 혜택을 부여하였다. 교관에 대한 명칭은 재정비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서는 교수(敎授, 종6품)와 훈도(訓導, 종9품)로 정착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교관의 수는 부윤부·대도호부·목·도호부에 파견된 교수가 72명이고, 군·현에 파견된 훈도가 257명이었다.

교관의 제도 정비와 함께 향교 생도의 정원에 대한 규정과 교육 과정 등이 마련되었다. 향교 생도의 경우 태종대인 1406년(태종 6) 정원이 정해졌는데, 읍격과 관련되어 유수부는 50명, 대도호부·목·도호부는 40명, 지관(知官, 군)은 30명, 현령·감무는 15명씩이었다(『태종실록』6년 6월 27일). 이후 성종 연간에 부윤부·대도호부·목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증액되었고[『성종실록』 2년 6월 6일],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생도들은 향교에서 유교 경전 중심으로 교육을 받았다. 사서오경이 중심이 되었다. 이밖에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 『성리대전(性理大全)』 및 역사책 등도 교재로 사용되었다. 평가는 강경과 제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강경에 중점이 두어졌다. 강경은 매일 실시되는 일강(日講)으로 진행되는데,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 등 5단계로 평가하였다. 하위인 조통과 불통은 벌을 받았다. 일강 이외에도 통고(通考)라 하여 매년 2회에 걸쳐 그 동안 배운 것을 시험하는 제도도 있었다. 제술은 수령이 매월 보름 전과 보름 후에 월과(月課)를 시행하였다. 제술의 경우도 통고 시험이 있었다. 성적 우수자는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호역(戶役)을 면제받게 하거나 생원·진사시의 2차 시험격인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直赴)의 혜택을 주었고, 교관 선발에서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교생들은 또한 도회(都會)를 통해 학업을 평가받았다. 도회란 향교 생도들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향교 생도들을 각도 도회소(都會所)에 모아 교육한 뒤에 이를 평가하는 제도였다. 1429년(세종 11) 1월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 등의 건의에 의해 시행한 것으로, 지역별로 도회소의 수효와 정원은 달랐다. 경상좌·우도에는 각각 2개소를 설치하고 매 1개소마다 40명을, 전라도와 충청도에 각각 2개소를 설치하고 매 1개소마다 30명을, 강원도에는 2개소를 두고 매 1개소마다 20명을,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각각 1개소를 두고 매 1개소마다 20명을, 함길도에는 1개소를 두고 15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이들 도회소에서는 봄에는 3월 보름 뒤부터 4월 그믐까지, 가을에는 8월 보름 뒤부터 9월 그믐까지 생도를 모아 경서를 가르치고 시험하였다[『세종실록』 11년 1월 3일]. 도회 제도는 이후 여러 번의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다가 『경국대전』에서 6월에 한 번만 실시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변천

중앙 정부의 향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제도적 정비 노력에도 불구하고 향교 교육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양반들이 향교에 나아가서 공부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향교 생도는 군역을 면제받았는데, 이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면서 향교의 생도는 군역을 피하고자 하는 기술관이나 서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군역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조대에는 군액(軍額)을 확충한다는 명분하에 ‘교생낙강정군법(校生落講定軍法)’을 제정하여 강경시험에서 떨어진 교생은 군역에 충당하였다. 또한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입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이가 40세가 된 자는 충군(充軍)하고, 40세가 되지 않아도 크게 학문의 진취가 없는 자는 생도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8년 7월 24일]. 결국 이런 상황은 향교의 질적 저하로 이어지면서 양반들이 더욱 향교에 나아가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쇠퇴한 향교에 대신하여 서원(書院)이 건립되었다. 이런 추세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는 향교의 중수와 정비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572년(선조 5) 예안향교가, 1567년(명종 22)~1568년(명종 23)에는 안동향교가 중수되었다. 이런 중수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향교의 교육적 성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더하여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이르면 교관의 파견이 중지되고 대신 지방의 사족이 교임(校任)을 맡아 운영하였다. 사족들은 향교의 학생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 이름을 올린 뒤에 유임(儒任)·재임(齋任)·집강(執綱) 등을 맡아서 향교 운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역시 교육적 기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들이 청금록에 이름을 올린 것은 여기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며, 아울러 양반의 지위를 인정받아 향촌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17세기 이후에는 중인이나 서얼, 그리고 평민들의 향교 입속이 증가하였다. 역(役)을 피하려는 것이었다[『인조실록』 2년 10월 20일]. 이렇게 되면서 향교의 생도는 신분에 따라 구별되거나 거처를 달리하게 되었다. 양반 출신의 생도는 유생(儒生) 또는 동재생(東齋生)이라고 하였고, 중인이나 평민 출신의 생도는 교생(校生) 또는 서재생(西齋生)으로 불렀다[『인조실록』 12년 10월 22일]. 이들 중인이나 평민 교생들은 향교에서 대성전(大成殿)을 수호하거나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기도 하였고, 고을의 객사에서 지내는 삭망례(朔望禮)를 주관하였으며, 고을에 왕래하는 사객(使客)을 영접하는 일 등을 맡아서 하였다.

피역을 위한 향교 입속이 많아지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각종 대책이 논의되었다. 어사(御史)를 파견해 조사해서 군역을 충당한다거나 고강(考講)을 실시해 불합격자를 군역에 충당하자는 의견 등이 있었다. 1626년(인조 4)에는 향교의 생도는 물론이고 서울의 사학(四學) 유생들까지도 고강을 실시해 불합격자는 모두 군역에 충당하는 사목(事目)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목에 대해서 삼남 지역의 교안(校案)에 등록된 자는 대부분 사족인데, 이들을 군역에 바로 충당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인조실록』 4년 8월 10일]. 이런 비판에 따라 1644년(인조 22)에 고강에 불합격하면 일단은 무학(武學)을 배우게 했다가 3년이 지나 무학을 시험해 불합격하면 군역에 충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향교 생도에 대한 고강법은 이후 법전에까지 규정되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조선후기에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향교가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에도 조선후기 이래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향교에서 이루어지는 제향(祭享) 기능 때문이었다. 향교의 중심이 된 건물은 문묘·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해서 중국과 한국 유학자들의 신위를 봉안하는 일종의 제향 공간이다. 이에 비해 명륜당과 동·서재는 향교 생도들의 교육관과 기숙사로 활용되는 강학(講學) 공간이다. 대성전인 문묘를 중심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가 진행되었는데 석전제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올리는 제례이다. 유학을 배우는 사족으로서 석전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사족들은 석전제를 통해서 지방민의 교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석전제에 참여함으로써 지방 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 받았다.

조선후기에 향교는 또한 지방의 여론을 모으고 지방 사회를 운영하는 데 중요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지방 사족들은 향교에 모여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현안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사문(斯文, 성리학)의 의리와 관련된 일 등과 관련해서 여론을 모을 일이 있으면 통문(通文)을 발행하였는데, 이때 향교는 서원과 함께 주요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숙종실록』 6년 윤8월 24일](『순조실록』 20년 8월 21일). 19세기 말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도입되는 가운데 향교의 재정이 공립소학교의 재정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향교는 교육기능을 상실하고 제향기능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존속되면서 소재지 유림과 주민들의 각종 행사와 친목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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