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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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왕의 특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된 사신.

개설

어사(御史)는 지방 행정을 감독하거나 수령을 감찰할 때, 혹은 중앙에서 사신을 파견해서 지방관을 대신하여 직접 수행해야 할 업무가 있을 때 파견하는 사신이다. 특수한 사명이 있을 경우 그 단어를 앞에 붙여 ‘OO어사’라고 불렀다. 지방 단위로 파견될 때는 도명을 붙이기도 했다.

담당 직무

어사는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으나 본격적인 활용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은 8도제와 군현제를 통해 전국을 일원적인 행정 단위로 편성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고려시대에 사신을 파견해서 시행하던 많은 업무를 수령에게 이관했다. 그러나 이처럼 수령의 권한이 높아지자 수령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수령에 대한 관리 감독 체제의 필요도 높아졌다.

도에서 하는 모든 행정과 도내 수령의 감찰은 원칙적으로 관찰사의 임무였다. 관찰사는 도내를 순행하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임무가 많아 1년 내내 관하를 순행할 수가 없었다. 재임 중에 한 번도 들르지 못하는 군현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따로 감찰관을 보내거나 전세(田稅) 수납, 양전(量田), 구휼 사업, 사신 접대와 같이 특별히 부정이 발생할 여지가 큰 사업,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 있을 때는 별도로 그것을 담당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그런 사신으로 어사, 경차관(敬差官), 대간(臺諫)을 파견하는 행대(行臺)·분대(分臺) 등이 있었다. 분대는 분대어사라고도 불렸다. 16세기 이후로는 경차관 파견을 자제하고 어사를 많이 활용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어사 파견이 더욱 증가했다.

한편 관찰사의 겸목제가 시행되고 관찰사의 업무에서 일반 행정 업무의 비중이 높아지자, 중국의 순안어사(巡按御史) 제도를 도입하여 도별로 어사를 파견해서 1년 내내 순행하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관찰사의 직무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시행되지 않았고, 어사는 임시 파견직으로 운영되었다.

어사는 보통 의정부나 비변사에서 추천하여 임명했다. 감찰을 위해 파견하는 어사는 분대어사, 암행어사가 있다. 암행어사는 17세기 이후 보편화되었으나 암행하지 않는 어사도 계속 파견되었다. 감찰 업무에서 어사는 3품 이하관에게만 현지에서 부정을 적발하여 직접 파직하거나 처벌하는 권한이 있었다. 대체로 수령의 업무 수행 사항을 평가해서 중앙에 보고하면 정부에서 포상과 처벌을 시행하고 추가로 조사할 사항이 있으면 관찰사를 시켜 조사·처리하게 했다.

특정 임무 수행을 위해서 파견하는 어사로는 군마를 점검하는 점마어사(點馬御史), 흉년에 구휼 사업을 관리·감독하는 진휼·재상어사(賑恤·災傷御使), 고난을 당한 백성들을 위무하는 선유어사(宣諭御使) 또는 위유어사(慰諭御使), 중국 사신단의 불법 상행위를 검사하는 수은어사(搜銀御使), 민란이나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안핵어사 등 다양한 어사가 있었다. 대동법의 시행, 양역 변통과 같은 국가 정책의 시행을 조사하고 개선 방향을 찾기 위해 어사를 파견하는 경우도 있었다(『영조실록』 1년 1월 23일).

조선후기에는 재정이 열악해지고, 환곡이 문란해지면서 진휼어사의 파견이 특별히 중요해졌다. 『속대전』에는 극심한 흉황(凶荒)이 있으면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진휼을 감독하게 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걸식 아동, 기아의 보호와 양육에 대한 감독도 진휼어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어사의 경우 맡은 임무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신은 임무 이외에 출장길에 보고 들은 민폐를 보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사는 예외였다. 『경국대전』에서 어사는 자기 임무가 아니라도 왕래하는 길에 보고 들은 민폐를 보고하게 했다. 실제로 어사들의 보고에 따라 해당 지역의 임시 관청이나 궁방전을 혁파하거나 세목(稅目)을 줄이는 등의 일이 많이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이희권, 『조선 후기 지방 통치 행정 연구』, 집문당,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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