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田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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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비옥도 및 한 해의 풍흉 정도를 참작하여 경작지 면적에 비례하는 토지 생산물을 수취하는 조세.

개설

조선은 조(租)·용(庸)·조(調)로 분류되는 수취제도를 운영하였다. 이 중 조는 경작지의 면적에 비례하여 부과되는 조세로, 전조(田租) 혹은 전세로 불렀다. 전통시대에는 농업의 비중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세금 수취와 재정 운영에서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국초에는 토지 1결(結)당 생산량을 300두(斗)로 설정하여 이에 대한 1/10 과세가 이루어졌다. 이후 세종대에 공법이 도입되어 1결당 생산량을 400두로 상향 조정하고, 이에 대하여 1/20을 과세하는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전기 전세는 그해 풍흉 정도에 따라 세액을 조절하는 정률세였다. 16세기부터는 해마다 풍흉의 정도가 최저에 해당하는 하하년(下下年)에 고정되는 경향이 나타나며 전세 수취액은 점차 하향 정액화가 되어 갔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정상화하고 민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세를 4두로 고정하는 영정법(永定法)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전세는 정액세로 바뀌었고,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축소되었다. 18세기에는 각 군현별로 일정량의 전세를 부담하는 비총제(比摠制)가 도입되었다.

조선후기 전세 총액은 100,000석 남짓이었지만, 대동법의 도입으로 공물이 폐지되면서 대신 토지에 세금을 더 부과하게 되었다. 또 환곡의 이자 수익이 국가 세입으로 흡수되는 경향이 확대되면서 토지에 대한 세 부과는 조선전기에 비하여 대폭 증가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경작지에 대하여 조세를 부과하여 국가 재원으로 삼는 것은 동아시아 전통시대 국가 운영의 공통점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그러한 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조선의 전세제도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경우 앞 시기에 비하여 전세 수취와 관련된 제도적 정비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국초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 세종대의 공법(貢法), 인조대의 영정법, 18세기의 비총제 등 여러 차례 전세 수취와 관련된 제도에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효율적인 수취를 통한 국가 재정의 확보라는 측면과 함께, 전세를 근본 산업인 농업에 부과하는 정세(正稅)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려는 이념적 차원의 노력도 함께 반영된 것이었다.

내용

조선의 전세 규정은 왕조 개창 이전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고려말 위화도회군 이후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던 건국 세력은 문란한 사전(私田)을 정비하는 한편 경작지에 대한 조세 부과도 1/10의 수취를 천명하였다. 십일제, 즉 생산물에 대한 1/10 과세는 유교 이념에서 시대를 초월한 올바른 수취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건국 세력은 십일제를 실제 전세 수취에 적극 채용하여 당대의 문란한 전제개혁의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시켰다. 개국 이후에도 이 전세 규정은 그대로 계승되어 실시되었다.

전세 부과를 위해서는 과세 기준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토지의 비옥도를 반영한 경작지 면적, 즉 결(結) 수였다. 조선은 결부제(結負制)로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양안(量案)에 기록하여 전세 부과의 기준으로 삼았다.

국초에는 토지를 상·중·하의 3등급으로 분류한 이후 각 등급별로 다른 자[尺]를 가지고 면적을 측정하였다. 즉, 비옥한 땅은 자의 길이를 짧게 하고 척박한 땅은 자의 길이를 길게 해서 1결의 토지 너비를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다르게 하였다. 이로써 토지의 비옥도가 어떠하든 1결의 토지는 동일한 생산량을 가지도록 하였다. 국초 1결의 토지는 최대 3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해의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조절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답험손실법이었다. 최대 생산량 300두부터 전부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까지를 10등분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하여 세액도 그 1/10로 조절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일정 지역의 1결 경작지에서 그해의 생산량이 300두의 50%인 150두일 경우, 전세 역시 그 1/10인 15두를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실제 생산액을 측정하는 절차를 답험 혹은 답험손실이라 하였다.

답험손실법은 그해 풍흉과 토질에 따라 조세 부과액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점이 있었으나, 반대로 재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일정한 세액 확보가 어려운 제도였다. 따라서 풍흉에 관계없이 1결 토지에서 일정한 액수를 거두어들이는 제도 도입을 고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공법이었다. 세종대 초반부터 공법 도입을 논의하였으나 결국 애초의 정세제 도입은 포기하였고, 대신 토질과 풍흉에 대한 구분을 더욱 세분하여 전분6등과 연분9등을 골자로 하는 공법 시행이 결정되었다. 즉, 토지 비옥도는 국초 3등분에서 6등분으로 더욱 세분화하고 풍흉의 정도는 상상년(上上年)에서 하하년에 이르는 9단계로 구분하여 조세를 부과하도록 한 것이었다. 아울러 1결 생산량은 400두로 상향 조정되었고 대신 그에 대해 1/20의 조세를 부과하도록 하였다. 즉, 1결당 최대 20두에서 최소 4두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었다(『세종실록』 26년 8월 24일). 공법의 내용은 새로운 토지 측량[量田] 방식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공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공법의 전면적 시행이 가능하였다.

한편 전세 수취는 각 군현 수령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또 답험 등의 업무에는 때때로 경차관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거두어들인 전세를 서울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조운제도가 운영되었다. 백성들이 정해진 조창에 전세를 납입하면 이를 조운선을 통하여 서울로 수송하였다. 다만 경기도의 경우에는 백성이 조세 납입처에 직접 납부하였으며, 평안도와 함경도는 전세를 서울로 보내지 않고 각 지방에 남겨 군자곡으로 비축하였다.

서울로 수송된 전세는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 그리고 각 재정 기관으로 분산되었다. 세종대에는 공법 도입과 함께 국용전제(國用田制)가 도입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는 기존의 각 관서에 직접 납입되던 방식을 폐지하고 호조(戶曹)에서 일괄 납입한 이후 각 관서별로 필요량만큼 분배해 주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호조는 전세 수입의 관리와 운영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는 관서가 되었다.

변천

공법의 도입 이후 16세기에는 전세가 점차 4두로 하향 고정화되어 갔다. 이에 대한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한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가 하나의 원인이 보인다. 즉, 토지를 기준으로 한 전세 부과 방식은 양반 지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연분 판정이 점차 하하년으로 고정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세의 하향 고정화는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전 국토가 피폐해지자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였다. 전세와 관련해서는 인조대 영정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전세의 하향 고정화 추세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여 1결당 4두 수취를 정식화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 재정 수입의 가장 큰 축이던 전세는 약 100,000석 내외의 수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 단위로 일정한 액수를 부담하는 비총제가 도입되었다. 즉, 국가가 그해의 풍흉 정도와 각 군현의 토지 결수를 참작하여 군현별 부담액을 결정하여 내려 주면 이를 각 군현에서 납입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총액제적인 조세 수취는 각 군현별로 사정에 따라 수취 부담을 조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과 국가행정을 간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각 군현 내부에서 자의적으로 수탈을 조장할 수 있다는 맹점 역시 함께 있었다.

조선후기 전세는 이전과 같이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이 도입되면서 종래에는 공물로 거두어들이던 것을 각 경작지에 부과하였다. 또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줄어든 군포 수입을 메우기 위하여 토지에 결당 3두의 결세를 추가적으로 부과하게 되었다. 여러 기준으로 부과되던 세금이 점차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방향으로 일원화되어 간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면 환곡도 부세화되어 토지에 대한 세금은 더욱 증가하였다. 즉, 세목으로서 전세의 비중은 극히 줄었지만 토지에 대한 조세 부과는 크게 증가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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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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