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굴(觀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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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국행수륙사(國行水陸社)로, 경기도 개성성거산에 위치한 절.

개설

관음굴(觀音窟)은 고려 광종 때 처음 조성된 절로 태조이성계가 잠저 시절 중창하여 원찰로 삼은 절이다. 조선 건국 후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씨들을 처참하게 죽인 뒤 이들을 위한 국행수륙재를 지내는 사찰로 삼았으나 세종대를 지나면서 점차 쇠락하였고, 성종대 굴이 무너진 뒤 수륙사의 기능이 영통사(靈通寺)로 옮겨지면서 왕실원찰 및 국행수륙사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음굴과 굴 안에 봉안된 고려시대 대리석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은 현재까지도 전하고 있다.

변천과 내용

개성성거산 박연폭포 상류에 위치한 관음굴은 고려 광종 때 처음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관음 기도처로 이름났으며 개성에서 가까워 고려 왕실의 행차도 잦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시대 관음석상 2구가 있어 관음굴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현재도 관음굴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고려시대 관음보살상 1구가 봉안되어 있고, 다른 1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개성 관음굴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태조이성계와의 인연 때문이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관음굴을 중수하여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이색이 기문을 찬술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관음굴을 중건한 공덕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여 관음굴 낙성을 경찬하는 화엄법회를 개설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마자 내탕고(內帑庫)를 내어 관음굴에서 반승(飯僧)한 것도 왕조 개창에 대한 은혜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태조실록』 1년 11월 15일). 이후 관음굴은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원당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관음굴은 태조대 국행수륙도량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태조는 1394년(태조 3) 삼척, 거제도, 강화도에 귀양 보낸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의 왕씨들을 모두 죽였다. 1395년(태조 4) 태조는 전년에 죽인 왕씨들의 명복을 빌고자 삼척의 삼화사(三和寺), 거제의 견암사(見巖寺), 개성의 관음굴(觀音窟)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였다(『태조실록』 4년 2월 24일). 이 수륙재는 태조의 왕명으로 설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숭유억불을 표방하며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고려조의 국행 불교 의례를 모두 혁파했던 조선에서 국가 주관으로 설행되었을 뿐 아니라, 매년 봄·가을에 항상 설행하는 상례화된 의례로 지정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태조는 수륙재를 설행하면서 수륙재 설행을 위한 의식집인 수륙의문(水陸儀文) 7본(本)과 금으로 사경(寫經)한 『법화경(法華經)』 1부를 하사하고 관음굴에 영구히 봉안토록 하였다.

태종은 관음굴 등에서 설행되던 국행수륙재 일자를 2월 15일에서 1월 15일로 변경하였고(『태종실록』 14년 2월 6일), 1418년(태종 18)에는 관음굴을 조계종에 소속시켰다(『태종실록』 18년 5월 28일). 이것으로 미루어 1418년까지 오랜 태조의 원찰이던 관음굴은 어느 특정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파이던 불교 교단을 선교양종으로 정리하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사씩 36개사를 공인했는데, 이때 관음굴은 선종 18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당시 관음굴이 가지고 있던 전지는 45결이었는데, 여기에 105결을 더 주었으며, 국행수륙사인 관계로 수륙위전(水陸位田)으로 특별히 100결을 더 지급하였다. 그리고 절에서 지낼 수 있는 승려는 70명으로 정하였다. 1443년(세종 25)경에는 관음굴을 중창하였다(『세종실록』 25년 8월 6일). 관음굴에서의 국행수륙재를 설행할 때는 조정 관료가 왕이 하사한 향(香)과 소문(疏文)을 가지고 갔다. 1447년(세종 29) 당시 강향사로 파견된 민건(閔騫)은 관음굴에 하사된 전지가 경기좌도에 있는 관계로 겨울에는 조운을 하기가 여의치 않아 시장에서 공양미를 구하고 있어 재의가 정결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서쪽의 적전(籍田)에서 생산된 것을 쓰도록 하고 절에 소속한 전지를 적당히 줄이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제향(祭享)을 위한 것을 사찰에 쓸 수 없다는 예조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세종실록』 29년 2월 13일). 한편, 세종대 관음굴은 전대에 비해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관음굴에서 처음으로 국행수륙재를 설행하며 하사했던 금자 『법화경』이 도둑맞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9년 5월 3일). 자물쇠는 그대로 있는데 경문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도둑맞은 사실을 발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성종대 접어들면서 관음굴은 매우 퇴락하였다. 1476년(성종 7) 유호인(兪好仁)이 남긴 개성 유람기인 「유송도록(遊松都錄)」에는 관음굴 뒤 비탈 아래 석불 10여 구가 있는데, 금칠이 부스러져 상의 모습을 거의 분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여 사찰의 피폐함을 전하였는데, 이듬해인 1477년(성종 8) 5월 관음굴은 무너져버렸다(『성종실록』 8년 6월 7일). 이때 조정에서는 무너진 관음굴을 중창하는 대신 개성에 영통사(靈通寺)를 새로 수륙사로 지정하였다(『성종실록』 8년 6월 30일). 1536년(중종 31) 관음굴에 주지 영오(靈悟)가 과일을 바쳤다는 기록이나(『중종실록』 31년 4월 9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음굴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 현재도 관음굴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굴이 무너진 뒤 국행수륙사이자 왕실원찰로서의 위상은 잃었으나 절은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양촌집(陽村集)』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호선,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62, 2013.
  • 탁효정, 「태조대 삼화사 수륙재 설행의 역사성과 의미」, 『두타산 삼화사 국행수륙대재의 전통성과 그 구조적 의미』, 2012 두타산 삼화사 국행수륙재 학술심포지엄 논문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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