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龍門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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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용문사 |
한글표제 | 용문사 |
한자표제 | 龍門寺 |
상위어 | 원당(願堂) |
관련어 | 경천사(敬天寺), 대장전(大藏殿), 미지산(彌智山), 용장사(龍臧寺), 오자순(吳子淳), 정지국사(正智國師), 삼보인(三寶印), 신정왕후(神貞王后)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용문사(龍門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4월 12일, 『세조실록』 2년 9월 7일, 『세조실록』 3년 6월 2일, 『성종실록』 14년 8월 16일, 『성종실록』 15년 12월 17일, 『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숙종실록』 21년 4월 12일 |
세종비 소헌왕후의 원당으로, 경기도 양평군용문산에 있는 절.
개설
세종비 소헌왕후가 1448년(세종 28)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조성하여 용문사(龍門寺)에 안치하였다. 성종대에 매년 소금을 하사하였으며, 숙종대에 용문사 범종이 땀을 흘리며 저절로 울렸다고 한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고려시대
양평용문산에 있는 용문사는 913년(신라 신덕왕 2)에 대경(大境) 대사(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용문산은 고려와 조선전기에 미지산(彌智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미지산이 용문산으로도 불리는데, 용문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용문사와 관련한 기록은 대장경 보관처로서 등장한다. 이색(李穡)이 지은 「지평현미지산용문사대장전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殿記)」에 의하면, 강화도 용장사(龍臧寺)에 있던 대장경 1질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게 되자 오자순(吳子淳)의 부인 구씨(具氏)가 보수하여 개경경천사(敬天寺)에 옮겨 보관하였다. 하지만 경천사 역시 바다와 가까워 다시 깊은 산중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때 승려 지천(智泉)을 만나 용문사에 보관하기로 하고, 1378년(고려 우왕 4)에 대장전(大藏殿)을 짓고 보관하게 되었다.
(2) 조선전기
용문사에 대장각을 세우고 대장경을 보관했던 지천이 1395년(태조 4) 가을에 입적하여 다비하였는데 사리가 많이 나왔다. 제자 각안(覺眼)은 부도를 세워 사리를 안치하고, 1398년(태조 7)에 서울로 상경하여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태조는 정지(正智) 국사(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지금도 권근이 쓰고 각안이 세운 「정지국사비(正智國師碑)」가 용문사에 전하고 있다.
그 후 용문사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1458년(세조 4)에 지어진 「용문사기(龍門寺記)」에 의하면, 용문사는 소헌왕후가 승하한 후 1447년(세종 29)에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꿈에 나타나 용문사에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조성하여 안치하라고 현몽하였다. 수양대군은 가깝게 지내던 신미(信眉)와 학조(學祖), 두 승려와 꿈에 대해 상의하고 조언을 얻어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의 2불(佛), 그리고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관음보살(觀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미륵보살(彌勒菩薩)의 8보살(菩薩)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고 한다.
문종대에도 왕실에서 시주하여 용문사를 중수하였다(『문종실록』 1년 4월 12일). 세조는 여러 차례 용문사에 물품을 하사하고(『세조실록』 2년 9월 7일) 또 삼보인(三寶印)을 주조하여 보내기도 했다(『세조실록』 3년 6월 2일). 「용문사기(龍門寺記)」에서는 ‘동국제일도량(東國第一道場)’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세조는 1462년(세조 8) 11월과 1466년(세조 12) 윤3월에 용문사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 성종은 원각사(圓覺寺)·장의사(藏義寺)·진관사(津寬寺)·봉선사(奉先寺)·복세암(福世菴)·만복사(萬福寺) 등과 함께 용문사는 선왕이 특별히 보호하였던 곳이므로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중히 금지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16일). 그 이듬해에도 관리들이 승려들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봉선사·회암사(檜巖寺)·정인사(正因寺)·정업원(淨業院)·복세암(福世菴)·연굴암(演窟菴)과 더불어 용문사는 왕실 재정 전반을 관리하던 내수사(內需司)에서 검찰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2월 17일). 그리고 매년 소금 120석을 하사하였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3) 조선후기~근대
조선후기에는 용문사에 관한 기록이 별로 전하지 않는다. 숙종대에 용문사의 범종이 땀을 흘리며 저절로 울렸는데, 땀의 빛깔은 약간 노랗고 소리는 마치 벌떼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숙종실록』 21년 4월 12일). 정조대의 문신 다산정약용은 순조대에 유배지로부터 돌아와 고향인 남양주에 머물며 인근 절을 자주 유람하였는데 용문사를 방문하고 읊은 시에서 "용문의 보찰이 폐허에 버려져 있고, 객이 이르니 빈산에 목탁 소리만 들리네[龍門寶刹委殘墟 客到山空響木魚]."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19세기에 용문사는 쇠락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1890년(고종 27)에 승려 봉성(鳳城)이 신정왕후(神貞王后)조대비(趙大妃)의 후원을 받아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뒤 1907년에 건물이 소실(燒失)되어 취운(翠雲)이 중건하였으며, 1938년에 태욱(泰旭)이 대웅전, 산신각, 종각, 요사 등을 중창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總督府, 『(增補校正)朝鮮寺刹史料』上 , 京城印刷所, 1911.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편,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 2』,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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