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奉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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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능인 광릉의 능침사로, 경기도 남양주시운악산에 있는 절.

개설

봉선사(奉先寺)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세조를 안치한 광릉의 능침사로 조성되었다. 세조의 아들 예종은 사찰명을 봉선사라 짓고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으며, 성종 역시 여러 차례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할 때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고 수진(守眞)을 주지로 임명하여 교종시(敎宗試)를 치렀다. 정조대에는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운악산 봉선사는 1468년에 승하한 세조를 안치한 광릉(光陵)의 능침사(陵寢寺)로서 조성된 사찰이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 969년(고려 광종 20)에 법인(法印) 국사(國師)탄문(坦文)이 창건한 운악사(雲岳寺)가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운악산이라고 하는 산 이름을 통해 고려시대부터 운악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조선전기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세조가 승하하자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정현조(鄭顯祖)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 등에게 왕릉 근처에 길지(吉地)를 택하여 능침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광릉 남쪽에 땅을 정하여 89칸의 대찰을 조성하였다. 이때 세조의 진영을 모시는 숭은전(崇恩殿)을 건립하고 참봉(參奉) 2인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예종실록』 1년 4월 21일). 그리고 세조의 아들 예종은 돌아가신 선왕(先王)을 받들어 모신 곳이라는 의미에서 ‘봉선사(奉先寺)’라는 사찰명을 짓고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숭은전은 1472년(성종 3)에 봉선전(奉先殿)으로 고쳐 불렀다(『성종실록』 3년 2월 14일).

봉선사의 공사가 끝날 무렵 예종은 낙산사에 머물고 있던 승려 학열(學悅)과 학조(學祖)를 불러 공사를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세조로부터 신임 받았던 승려였으므로 그 위세를 이용해 기둥이 지나치게 높다거나 재목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전각 몇 채를 새로 짓도록 요구하기도 했다(『예종실록』 1년 6월 27일). 마침내 범종이 완성되고(『예종실록』 1년 8월 29일) 공사가 마무리되자 왕이 직접 광릉에 가서 제사 지내고 봉선사를 방문하여 숭은전에서 제사하였다(『예종실록』 1년 9월 8일).

이후 봉선사는 왕실 원당(願堂)으로서 잡역(雜役)이 면제되고 왕실에서 주최하는 여러 재(齋)가 베풀어졌다. 성종은 1471년(성종 2), 1482년(성종 13), 1489년(성종 20)에 직접 광릉에 가서 제사를 거행하고 봉선사 숭은전에 들러 다례를 행하였으며, 대비들도 직접 방문하여 제사 지냈는데 1472년(성종 3)에는 대왕대비, 인수대비, 왕대비가 함께 광릉에 가서 제사 지내고 봉선전과 봉선사에 들러 축원하였다(『성종실록』 3년 2월 22일). 이 외에도 수시로 봉선사에 쌀과 면포 등을 하사하였으며 건물 수리를 명하였다. 그러나 유학자 관료들은 1491년(성종 22) 10월에만 8차례 왕실의 봉선사 지원에 대해 부당하다며 간언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왕실의 숭불(崇佛)과 대신들의 억불(抑佛)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연산군 초에는 왕실의 지원이 지속되었으나 연산군의 횡포가 심해짐에 따라 봉선사에 대한 지원도 점차 줄었다. 연산군은 광릉의 참봉을 혁파하고 제사를 봉선사 승려들이 전담하도록 했으며(『연산군일기』 11년 5월 2일), 수호군 없이 제물(祭物)을 역마로 옮기도록 했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13일). 그러나 중종은 1509년(중종 4)에 직접 광릉을 방문하여 제사지내고 봉선전에서 다례를 행하였다(『중종실록』 4년 윤9월 12일). 그럼에도 대신들은 불교의 근거지를 없애려면 봉선사를 철거해야 한다며 여러 차례 혁파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대신들의 요구에 대해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대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불교계를 중흥하였다.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와 봉선사 주지 수진(守眞)을 등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하고 1551년(명종 6)에 봉은사(奉恩寺)를 선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삼았다. 이때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임명되어 전국의 선종 사찰을 관장하고, 수진은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에 임명되어 전국의 교종 사찰을 관장하였다(『명종실록』 6년 6월 25일). 그리고 1551년 11월에 승려 선발 시험인 승시(僧試)를 실시하여 승려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신분증명서를 발행하는 도첩제를 부활시켰고(『명종실록』 7년 1월 10일), 1552년(명종 7) 4월에는 승려 관리 선발 시험인 승과 고시를 부활하여 교종시(敎宗試)는 봉선사에서 실시되고 선종시(禪宗試)는 봉은사에서 실시되었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이때부터 승과가 총 5회 실시되어 매번 선종 21인과 교종 12인을 선발하였다.

(3) 조선후기~근대

임진왜란 당시 병화(兵火)로 봉선사 전체가 소실되었는데 봉선사 승려 삼행(三行)이 참봉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봉선전에 있던 세조의 영정을 끝까지 지켜내었다(『선조실록』 26년 3월 16일). 당시 주지로 있던 낭혜(朗慧)는 전란으로 불탄 봉선사를 1593년(선조 26)에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때에도 절의 일부가 병화를 입었으나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에 주지 계민(戒敏)이 다시 중창하였다. 1691년(숙종 17)에도 화재가 나서 승사(僧舍) 60여 칸을 태워 광릉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기도 했다(『숙종실록』 17년 3월 18일). 그러나 그 후 언제 중창했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1715년(숙종 41)에 청풍루(淸風樓)를 처음 짓고, 1749년(영조 25)에 주지 재점(再霑)이 법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92년(정조 16)에 정조가 광릉을 방문하여 참배할 때 봉선사 승려를 위로하였다(『정조실록』 16년 9월 11일). 또한 정조대에는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었다. 5규정소란 승려들의 과실을 바로잡는 사찰을 의미하였는데, 봉은사를 비롯하여 양주 봉선사, 남한산성 개운사, 북한산성 중흥사, 수원 용주사를 말한다. 봉은사는 강원도 사찰, 봉선사는 함경도 사찰, 개운사는 충청·경상도 사찰, 중흥사는 황해·평안도 사찰, 용주사는 전라도 사찰을 감찰하였다. 봉선사의 중수는 19세기에도 이어져 1848년(헌종 14)과 1898년(광무 2)에 건물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물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1914년에 청풍루·방적당·운하당·해탈문·천왕문 등의 건물 일체를 새롭게 중수하였고, 1926년에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기타 요사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사찰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유물로는 봉선사 창건 당시에 주조한 범종이 대표적이다. 범종의 명문에 ‘성화오년(成化五年)’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1469년(예종 1)에 주조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1735년(영조 11)에 상궁 이성애(李性愛)가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김씨(寧嬪金氏)의 추복(追福)을 위해 시주해 승려 각총(覺聰)이 그린 괘불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부도와 비석 등을 통해 봉선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다산문화연구소, 『운악산 봉선사』, 景仁文化社, 2008.
  • 사찰문화연구원, 『인천경기도의 사찰 2』,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5.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봉선본말사지』, 아세아문화사, 1978.
  • 남진아, 「조선초기 왕실발원 범종 연구」,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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