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抑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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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억불 |
한글표제 | 억불 |
한자표제 | 抑佛 |
동의어 | 배불(排佛) |
관련어 | 선교양종(禪敎兩宗), 사원전(寺院田), 사원노비(寺院奴婢), 도첩제(度牒制), 승과제(僧科制), 문정왕후(文定王后), 보우(普雨), 숭유억불(崇儒抑佛)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억불(抑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세종실록』 6년 4월 5일, 『세종실록』 31년 1월 29일, 『성종실록』 2년 12월 5일, 『성종실록』 5년 8월 23일, 『성종실록』 6년 5월 26일, 『중종실록』 11년 12월 16일, 『중종실록』 33년 9월 26일, 『명종실록』 5년 12월 15일, 『명종실록』 6년 10월 23일,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
불교를 배척하고 억압한다는 의미로, 조선시대 불교 정책의 기본 노선.
개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한 조선 왕조는 태종 때부터 억불(抑佛)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세종 때는 전국의 많은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정리하고, 국가 공인 사찰을 36사로 제한하였다. 이후 성종, 연산군, 중종대를 거치면서 도첩제, 승과제가 폐지되고 도승조(度僧條)가 삭제되었으며 승려 살해 사건 등이 발생했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힘으로 불교가 잠시 부흥되기도 했지만, 사후에는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면서 억불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초의 억불 정책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유신(儒臣) 관료들에 의해 국가가 불교를 정책적으로 억압하고자 한 억불 정책이 채택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존숭되었지만 고려말기에 이르면 기복주의적 신앙과 사원의 토지와 노비의 과다 소유, 지나친 불사(佛事), 일부 승려의 타락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종교 지도력이 상실되는 등 수많은 사회·경제적인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이에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사대부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강력한 배불론(排佛論)을 전개해 갔다. 배불론을 주도한 신흥사대부는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폐하고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등장하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추진하게 되어 조선시대 불교는 모진 탄압을 받는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조선 개국 초의 불교 탄압은 유신들에 의해 강력히 제기되지만 태조이성계가 불교를 신봉하였고, 또 건국 초라는 이유를 들어 불교의 폐습을 시정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태조는 태고(太古)와 나옹(懶翁)과 같은 고승을 사사하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때는 당시 궁궐을 출입하던 승려인 신조(神照)의 자문을 받는가 하면, 조선 개국 후에는 무학(無學)을 왕사로 삼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불자였다. 하지만 태종대부터는 전과는 다르게 억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405년(태종 5) 3월 의정부의 요구에 따라 태종은 한양과 개경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 각 종파의 사찰을 1개로 한정하고, 지방의 목과 부에는 선종과 교종에서 각 1사(寺)씩, 군과 현에는 선종과 교종을 합하여 1사씩만 남게 하고, 나머지 사찰은 모두 철폐하도록 했다.
이 시책은 1406년에 더욱 구체화되어 국가에서 공인한 전국의 사찰은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이 합하여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이 합하여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이 합하여 43사, 자은종(慈恩宗)이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이 합하여 30사, 남산종(南山宗)과 시흥종(始興宗)이 각 10사씩 남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전국의 사찰은 11개 종의 총 242사였다. 이때 전국 사찰로부터 몰수한 노비 수는 총 8,000여 구, 토지는 총 1,7000여 결에 이르렀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또 1407년(태종 7)에는 기존의 11개 종을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 7개 종으로 통폐합하고 국가의 복을 기원하는 사찰인 자복(資福) 88사를 지정하였다. 자복 88사의 종파별 분포는 조계종 24사, 천태종 17사, 화엄종 11사, 자은종 17사, 중신종 8사, 총남종 8사, 시흥종 3사였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세종은 태종의 억불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먼저 1424년(세종 6) 태종 때 잔존한 7개 종을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통합하고 양종에 각각 18사를 소속시켜 중앙과 지방의 사찰을 모두 합쳐 총 36사를 두도록 하였다. 국가 공인의 사찰이 태종대의 242사에서 선종과 교종 소속의 36사로 축소된 것이다. 이들 36사의 토지는 7,950결, 승려는 3,770명으로 제한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세종 때는 이외에도 도성 내에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만을 남기고 모든 사원을 철폐하고, 승려들이 도성 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승려 출가에 대한 허가증을 국가가 발급하는 도첩제를 엄히 하면서 연소자의 출가를 금지하였다(『세종실록』 31년 1월 29일). 특히 세종 때 단행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는 이후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면서 억불 정책의 상징적인 조치가 되었다.
경복궁 안에 왕실사찰로서 내불당(內佛堂)이 건립된 세종 말엽 이후 세조대에는 억불의 기세가 완화되면서 도처의 사원이 재건되거나 증축되고 사원 소유지의 토지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조 제일의 호불 군주로 평가되는 세조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2) 성종~중종대의 억불 정책
세조 후 성종 때는 억불 정책이 한층 강화되었다. 성종은 1471년(성종 2) 세조 때 불경의 국역과 판각을 관장하던 기관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폐지하고(『성종실록』 2년 12월 5일), 양반들의 출가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도첩제를 실시하였으며(『성종실록』 5년 8월 23일), 부녀자의 출가를 원천적으로 허가하지 않았다(『성종실록』 6년 5월 26일). 1492년(성종 23)에는 이 도첩제마저 폐지하여 새로이 승려가 되는 것을 국가에서 법적으로 금지시키고 기존의 승려는 환속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여 이후 승려의 수는 격감하였다. 강력한 불교 억압 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도 극도로 위축되어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 시기의 상황을 성종 때의 문신이었던 성현(成俔)은 "내외(內外)에 사찰이 모두 비었다."고 표현했다. 성종대의 억불 정책은 연산군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조의 폭군인 연산군은 1502년(연산군 8) 선교 양종을 없애고 승과(僧科) 제도를 중지했다. 승과는 승려를 대상으로 한 과거로, 승과 합격자에게는 일정한 품계가 주어졌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철폐하는 것과 함께 대원각사(大圓覺寺),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 선종의 본사인 흥천사를 모두 철폐하여 관아 소유의 건물로 삼고 승려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도성 내의 비구니 사찰 역시 철폐되고 비구니를 궁방의 노비로 삼았다. 이로써 사실상 양종의 실질적 기능이 정지되고, 1504년(연산군 10)에는 예정된 승과를 시행하지 않았다. 고려 광종 이후로 실시되었던 승과 제도의 중단은 그동안 국가에서 공인해 왔던 불교 교단의 사회적 지위가 상실되었음을 의미했다. 1503년(연산군 9) 조정, 왕실과의 연고 유무를 가리지 않고 전국 사찰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능침사찰 및 내원당과 태조 이래의 수륙위전(水陸位田)까지 완전히 혁파하는 조치가 있었다. 이것은 사원경제의 완전한 수탈로서 사원과 교단의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에는 비구승에게 혼인을 강요하고 각처의 비구니를 소속 지역의 노비로 삼게 하는 등 패륜적인 조치가 이어졌다.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도 억불 정책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중종이 연산군 때 사화(士禍)로 거세된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면서 그들에 의해 도학정치(道學政治)가 실시되자 불교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1507년(중종 2) 예정된 승과를 시행하지 않아 승과제를 실질적으로 폐지하였고, 『경국대전』에 명시된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도승조(度僧條)마저 삭제하여 불교 자체를 없애려는 폐불(廢佛) 조치를 내렸다(『중종실록』 11년 12월 16일). 또한 1538년(중종 33)에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사찰을 일체 철거하라는 명이 떨어져, 수많은 승려가 죽음을 당하고 사찰이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중종실록』 33년 9월 26일). 훗날 허응당(虛應堂)보우(普雨)는 이 사건을 두고 "연산군 때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고, 중중 때 버림을 받았고, 승려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들짐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의 심각성과 폐해를 고발했다.
(3) 명종대의 불교 부흥
조선 불교는 명종 때 문정왕후의 섭정과 보우의 등용으로 잠시 중흥하는 계기를 맞기도 했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는 먼저 1551년(명종 6) 선교 양종을 복립하고(『명종실록』 5년 12월 15일),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부하는 도첩제를 부활하였다(『명종실록』 6년 10월 23일). 그리고 1552년 승과제를 부활해 식년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불교계에 중흥의 기운을 불어넣었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하지만 이것도 잠시 명종이 장성하여 국정을 관장하기 시작하면서 불교 교단이 서서히 위축되다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의 타계와 뒤이은 보우의 죽음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전과 같이 선교 양종과 승과제, 도첩제가 모두 폐지되면서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기에 잠시 찾아온 불교 중흥은 조선중기 이후 불교 존립에 필요한 인적, 물적 기반을 상당 부분 제공해주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명종대 이후에는 억불이라고 할 만한 시책이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이는 사찰의 토지가 대부분 몰수되어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고, 승과 제도와 양종이 폐지되어 교단과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였으며, 또 도성 내의 사원이 모두 폐지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이 전면 금지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억불이 시도될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조계종사, 고중세편』, 조계종출판사, 2004.
- 이재창, 『한국불교 사원경제연구』, 불교시대사, 1993.
- 윤기엽, 「조선초 사원의 실태와 그 기능」, 『불교학보』46,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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