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사(文殊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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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수사 |
한글표제 | 문수사 |
한자표제 | 文殊寺 |
관련어 | 삼각산(三角山),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정의공주(貞懿公主), 안맹담(安孟聃), 조계종(曹溪宗)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삼각산 |
시대 | 고려~현대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수사(文殊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5월 5일, 『문종실록』 1년 5월 5일 |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의 원당으로, 서울 종로구 구기동삼각산에 있는 절.
개설
문수사(文殊寺)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초기에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남편 안맹담(安孟聃)이 중창해 원찰(願刹)로 삼았다.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이후 복원, 꾸준히 중건하였다.
내용 및 변천
1109년(고려 예종 4) 대감(大鑑) 국사(國師) 탄연(坦然)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시대 들어 1451년(문종 1)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이 중창하였다. 안맹담은 1428년(세종 10) 부마가 되어 죽성위(竹城尉)에 봉해졌다가 이어 연창군(延昌君)·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었다. 절의 중창 과정에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 당시 절을 새롭게 짓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고, 고쳐 짓는 일도 모두 관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정의공주는 이보다 앞서 집 안에 부처를 모시는 불우(佛宇)를 지었다가 허문 일이 있었는데, 이 재목으로 문수사를 중건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5일). 중건이 끝나자 관아에서는 법을 어겼다며 주지를 강제로 환속시켰고, 절을 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예전 그대로의 규모로 복원한 것이지 새롭게 증축한 것이 아니므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울러 환속시킨 승려도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명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5일). 정의공주는 남편이 사망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수륙의문(水陸儀文)』·『결수문(結手文)』·『소미타참(小彌陀懺)』·『묘법연화경』 등의 목판을 간행하였다. 부부의 묘역 양효안공신도비와 묘소[良孝安公神道碑附墓所]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의 1에 있다.
근현대에 들어 중건이 꾸준히 이어졌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방문해 ‘문수사’의 사액(寺額)을 남기기도 하였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로서 대웅전과 삼성각, 나한전, 동굴법당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1994.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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