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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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고려 우왕 14)에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다가 위화도에 머무르던 중 회군한 사건.

개설

1388년에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은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겠다는 명나라의 통보를 받고 요동(遼東) 정벌을 추진하였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던 이성계는 4가지 불가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으나 요동 정벌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성계가 명령을 따라 출병(出兵)하여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을 때 많은 군사가 도망하고 동요하였다. 이성계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인 조민수(曹敏修)와 함께 정벌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에 군사들의 도망이 계속되고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이성계는 조민수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태조실록』 총서 84번째기사].

역사적 배경

이성계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시중(侍中)이인임(李仁任)과 그 일파를 1388년 1월에 최영과 합세하여 제거하였고, 이후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 황제는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 서쪽이 원래 개원로(開元路)라는 이유로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을 요동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개원로는 중국 원나라 때 카이위안[開元]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으로, 지금의 지린성[吉林省]과 랴오닝성[遼寧省] 남부의 땅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을 말한다. 고려 백관들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이자송(李子松)을 처형할 정도로 요동 정벌에 대한 우왕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발단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는 요동 지역 군사가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를 세우려 한다고 보고하였다. 명나라에서도 요동백호(遼東百戶)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를 세운다는 사실을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로 인해 비밀리에 추진되던 고려의 요동 정벌이 공식화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에게 허술한 틈을 보이게 되는 것, 한창 장마철이어서 활[弓弩]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역병(疫病)을 앓을 수 있는 것 등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의 말을 따라 정벌을 밀고 나갔다.

경과

우왕은 평양에서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출전할 채비를 하였다. 승병(僧兵)도 조직하였다. 최영은 팔도도통사,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는 좌군도통사,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를 각각 맡았다. 군사는 5만여 명이었다. 이성(泥城)에서 온 사람이 요동 군사가 거의 오랑캐 정벌을 나간 상태라 승리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하였고 우왕과 최영은 상당히 고무되었다.

5월에 이성계 등은 대군(大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머물렀다. 이때 도망하는 군사가 속출하였는데, 도망하는 군사를 붙잡아 참형(斬刑)에 처해도 효과가 없었다. 이성계는 회군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조가 동북면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군사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조민수와 장수들이, 상국(上國)을 침범하여 종사와 생민을 화에 빠뜨릴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전폭적으로 따르자, 이성계는 회군을 단행하였다.

조전사(漕轉使)최유경(崔有慶)에게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은 최영 등과 함께 도피하였다. 이성계는 6월 1일에 최영의 군대를 대파(大破)하였고, 최영을 찾아 유배하였다. 후에 그는 자신 등을 살해하려 한 우왕을 폐하였다. 이어 이성계의 의도와는 달리 조민수가 주도하여 창왕을 즉위시켰으나, 명나라에서는 이성(異姓)을 후사로 삼았다고 창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김저(金佇)를 통해 이성계를 다시 살해하려 했던 우왕의 음모도 실패로 끝났다. 이에 이성계는 폐가입진(廢假立眞), 곧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창왕을 폐하고, 자신의 인척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기에 이르렀다[『태조실록』 총서 100번째기사]. 몇 차례의 정치적 위기를 겪기는 하였지만,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 김당택,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 개혁」, 『전남사학』24, 2005.
  • 김정의, 「위화도회군에 관한 고찰」, 『군사』16, 1988.
  • 도현철, 「위화도 회군, 역사의 순리인가 반역인가: 전근대 권력 변동의 이중성」, 『역사비평』34, 1996.
  • 민현구, 「조선 태조대의 국정 운영과 군신 공치」, 『사총』61, 2005.
  • 이익주, 「고려 말 신흥 유신의 성장과 조선 건국」, 『역사와현실』29,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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